ⓒ시사IN 조남진3월31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외부에 설치된 개방형 선별진료소에서 해외 입국자들이 코로나19 검사를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외교는 재난 속에서 시작됐다. 2009년 외교통상부가 펴낸 〈한국외교 60년〉 부록에 실린 ‘외교관계 주요 문서’의 첫 페이지는 대한민국 승인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과를 담은 1948년 12월12일자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Ⅲ)’로 시작한다. 곧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한국전 참전 결의가 담긴 1950년 6월27일자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에 관한 안보리 결의(S/1511호)’, 1953년 7월27일자 ‘한국 정전협정’ 등이 따라붙는다. 외교 성과란 주로 분단과 전쟁이라는 국가 재난 속에서 국민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미국 등 강대국에게 승인받고 요청하며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다시 대한민국의 외교가 재난 위에 놓였다. 이번에는 감염병이고 전 지구적 위기이다. 코로나19에 ‘외교 성과’라는 말이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그 조합이 일어났다. 불안에 떨던 재외국민을 전세기에 태워 자국으로 수송해오고,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메시지가 온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 방역 모델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각지에서 지원 요청이 쇄도했다. 70년 전 자국민을 지켜내기도 힘들었던 약소국이 어느덧 전 세계인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한 편의 영웅서사시처럼 코로나19 확산 초기 국제사회에서 겪은 수모와 굴욕을 한순간에 뒤집은 터라 국민들은 더욱 감동하고 기뻐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기회가 되어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서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의 영웅이어야 할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패권국이 되어 세계를 호령하고 약소국에게 은혜를 베푸는 영웅일까? 아니면 가르치는 동시에 배우고, 경쟁하고 경합하는 대신 연대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세계화의 중심축 국가여야 할까? 코로나19는 그간 ‘눈치 보고 줄 잘 서면 된다’ 정도로 인식되던 대한민국 국제정치의 단계를 몇 등급 올려놓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주간 코로나 19’는 대한민국 외교의 ‘뉴노멀’을 논하기 위해 이준호 외교전략기획관을 초대했다. 외교전략기획관실은 외교부 내에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 부서다. 이준호 기획관은 1994년 외무부에 들어온 뒤 주영국·주우즈베키스탄·주미국 대사관과 북핵정책과, 국가안보실, 국회사무처 등을 두루 거친 26년 차 ‘외교통’이다. 고정 멤버인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예방의학 전문의),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감염내과 전문의·경기도 코로나19 긴급대책단 공동단장)도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세계화의 방향을 함께 고민했다. 대담은 4월28일 저녁 〈시사IN〉 편집국 회의실에서 진행했다.

ⓒ시사IN 이명익왼쪽부터 이준호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오늘 국내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지 100일이다. ‘주간 코로나19’도 벌써 6회째다. 100일 전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코로나19는 훨씬 장기전이다.

김명희:코로나19 관련 보건의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지난주 매우 바빴다. 어제 부산에 가서 감염병관리지원단과 이주노동자 단체를 인터뷰하고 오늘은 서울의료원에 갔다. 노동조합 인터뷰도 가고 회의도 하고…. 확산 초기에는 돌아다닐 수 없어서 화상으로 논문 리뷰 정도를 하다가 이제 본격 인터뷰에 들어가니 몸이 피곤해졌다. 아침에 눈이 이렇게 부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빠진 거다(웃음).

임승관:소강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해진 건 고맙고 다행스러운데, 잘 아시다시피 제가 비관론자이지 않나. 좋게 말해 신중론자(웃음). 그런 관점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난주, 이번 주에 미디어나 정보 수용자들에게 잘 가닿지 않았다. 대중이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자축하고 박수치고 격려하고 이런 것들인데, 나는 계속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방금도 코로나19 100일 특집으로 한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고 왔는데 계속 “이제 도입부입니다”라며 찬물을 끼얹었다(웃음).

외교관의 일상은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달라졌나?

이준호:일단 가장 특징적인 건 출장을 못 가고 있다. 1월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다. 다자외교 쪽에 근무하는 동료들은 국제기구 출장이 많은데 그것도 없어졌다. 또 하나의 변화는 우리 교민들을 보호하고 타국과의 코로나19 대응 협의를 위해 24시간 상시 비상근무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출장이 없어진 대신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의가 이어진다. 장관과 직접 통화하는 횟수도 많고, 밤에도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예전보다 일이 많아진 것 같다.

또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참여해서 직원 절반이 재택근무를 한다. 화상회의가 실질적으로 많이 이뤄졌다. 간부 회의도 화상회의로 전환되고, 장관도 해외 주재 공관장과 화상회의를 열고, 외교부 과장들도 재택근무 중 직원들과 화상회의로 업무를 한다. 외국과도 화상회의로 대화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G20, 아세안+3 회의에서 화상으로 정상들과 만났다.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숱한 외교 사안이 발생했다.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나?

김명희:중국인 입국금지 주장이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많이 나왔는데, 사실 의학의 문제와 방역의 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의학은 학문적으로 결론을 내릴 순 있지만 방역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논리가 혼재되어서 ‘조금의 리스크도 감수할 수 없다’ ‘중국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의학계 안에서도 나왔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나갈까 궁금했는데 문 대통령이 초기에 “혐오로는 이걸 극복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1월30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대응 종합점검 회의’에서 “신종코로나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는 공포와 혐오가 아니라 신뢰와 협력이다”라고 말했다).

임승관:같은 의사단체 회원들과 텔레그램 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 정부가 중국발 외국인에 대한 입국을 금지한 날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국가 간 이동을 제한하는 게 해답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바로 며칠 뒤였다. 국제적 거버넌스인 WHO의 메시지와 회원국의 메시지가 서로 다른 상황을 보고 보건의료 종사자들끼리 “국제정치가 굉장히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구나”라고 이야기를 나눴다.

팬데믹은 원래 어려운데 거기에 국제정치까지 고려해야 하니 정말 어렵다. 그런데 하필 왜 트럼프 정부 때 이런 어려운 숙제가 던져졌을까? 만약 다른 정부라면 과연 어땠을까?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끼리 서로 돕고 WHO의 메시지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팬데믹 대응을 시작하지 못하는 모습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연합뉴스2월1일 김포국제공항에 입국한 중국 우한 교민들이 전세기에서 내리고 있다.

이준호:코로나19 확산 초기 입국 제한이나 지역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원칙이 된 포뮬러(formula, 방식)가 바로 개방성이다. 초기에 무조건적인 입국 제한보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우한을 포함한 후베이성 지역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 대해 입국금지를 결정했다. 이후 개방성 원칙 아래서 시행한 제도들, 예를 들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입국자 모바일 자가진단 앱) 설치 같은 특별입국 절차 같은 보완책도 있었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투명하게 다른 국가와 교류하기도 했다. 이런 개방성 원칙은 해외 상황 악화에 따라 향후 조금씩 입국 제한조치 국가를 늘리면서도 꾸준히 유지되었다.

우한 교민 수송 작전이 인상적이었는데 외교부에서도 그런 경험은 처음인가?

이준호:외교부는 해외에서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 조력 제공의 오랜 경험이 있지만 이번과 같은 규모의 사태는 처음이었다. 우한에서 국민들을 수송한 뒤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곳에 잔류하게 된 국민들을 지원했다. 타국의 총영사관들은 모두 철수한 시점인 2월 중순에 새로 임명된 강승석 우한 총영사는 여객기가 없는 상황에서 지원물품을 보내는 화물기를 타고 우한으로 들어갔다.

김명희:사실 해외 영사에 관해 안 좋은 이미지가 많았다. 교민이 도와달라고 해도 잘 안 도와준다거나, 영사가 뭔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물러나게 됐다거나 그런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국민들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든든했다.

이준호:우한 내 우리 국민 수송 과정은 외교부 직원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재외국민을 국내에 수송해오기 위한 정부 전세기 투입 작전은 이탈리아, 이란 등에서도 계속되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우리 대사가 여러 국적의 체류자들을 다 모아서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고, 한국 방역물품을 사겠다는 나라들에서 우리 국민을 태워온 후 다시 물품을 보내주는 경우 등 다양했다. 전 세계에서 귀국을 희망하는 모든 국민을 최대한 한국에 모셔올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지원했다.

기존 항공편이 다 막힌 상황에서 예외적인 경로로 교민을 데리고 오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해외 각국과 숱한 물밑 교섭이 이루어졌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

이준호:교섭 과정에서 비행기가 뜰 수 있는 시간이 쉴 새 없이 바뀌었고 그 과정도 복잡했다. 원래 이용하기로 한 항공편이 갑자기 끊기기도 하고, 비행기 좌석을 채울 수 있는 재외국민을 모으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내 국민 수송 과정이 생각난다. 키르기스스탄은 내부 왕래가 거의 통제되어 있고 세 개 도시 정도는 완전히 내부가 봉쇄된 상태였다. 카자흐스탄은 국경을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비행기는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서 뜨도록 계획돼 있고 두 나라에서 우리 국민을 모아서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키르기스스탄과 협조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재외국민 30여 명을 모아서 한 장소에 집결시킨 다음 또 카자흐스탄 정부와 협의해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었다. 카자흐스탄 경찰이 직접 엄호해줘서 알마티 공항까지 이동하고 섭외한 비행기에 모두 태웠다.

현재 해외에 남은 우리 국민 가운데 코로나19 감염 피해가 얼마나 집계되고 있나?

이준호:현재(4월28일)까지 우리 재외국민 가운데 96명이 확진되었고 그 가운데 32명이 완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확진을 받은 경우 공관에서 여러 지원을 해주고 국군의무사령부에서 화상으로 원격의료 상담을 진행한다. 전체는 어렵더라도 가급적 최대한 파악하고 지원해드리려고 노력 중이다.

외국에 항의하거나 요청해오던 초기를 지나 어느 순간부터는 반대로 한국이 도움을 요청받았고 지원을 해주게 되었다. 외교 현장에서 그 변화를 체감했나?

이준호:실제로 그랬다. ‘3T(Test(진단)· Trace(추적)·Treat(치료))’라고 불리는 한국 방역 모델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국민들의 자발적인 마스크 착용,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 등을 외국 정부와 언론매체들이 관심을 갖고 배우고자 했다. 우리가 보유한 감염병 관련 통계, 임상 경험 사례를 WHO 등 국제기구나 여타국들과 지속적으로 투명하게 교류해왔다. 진단키트를 포함한 방역물자는 확실히 해외에서 경쟁력이나 수요가 높아서 지금도 요청이 매우 많은 상태다.

임승관:진단키트 지원이나 판매 요청이 오면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지 궁금하다.

이준호:인도적 지원 차원에서는 의료 취약국 등 위주로 선정해나가야 할 것 같다. 판매에 관해서는 해당 국가와의 외교·경제적 관계 외에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재외국민들의 수송 지원에 해당국의 도움 제공 여부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감안해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 측에서 진단키트 판매를 요청해와서 75만 개를 판매한 사례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판매나 지원을 할 수 있다.

ⓒ연합뉴스4월6일 온두라스의 한 공군기지에서 관계자들이 한국산 코로나19 진단키트를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코로나19 국면을 지나며 국제무대에서 한국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나?

이준호:그간 ‘중견국’ ‘미들 파워’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이었다. 이번에 한국 위상이 높아지면서 대외적으로 내보내는 메시지에 대한 관심도도 확실히 올라갔다. 중추적 중견국가가 되었다고 느낀다. ‘컨비닝 파워(convening power, 소집의 힘)’가 좀 많이 생겼다. 한국을 빼놓고는 세계에서 어젠다 논의가 되지 않는 그런 형태의 국가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G20, 아세안+3 같은 논의체에서 한국의 방역 경험, 글로벌 공급망 유지의 필요성, 필수 기업인의 이동에 관한 절차 형성 필요성에 대해 의견도 내고 또 그것들이 논의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한국이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니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는 모습이었다. 한 단계 앞서서 국제적인 논의를 선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례에서 ‘이번 국면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나?

이준호:일단은 대통령과 장관에게 외국 정상과 장관으로부터 전화통화 요청이 쇄도한다. 주한 대사관을 통해서도 오고, 해외 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서도 오고, 다양한 경로로 온다.

정말 해외 정상들이 문 대통령과의 통화를 줄 서서 기다릴 정도였나?

이준호:통화 날짜를 잡아줘야 한다(웃음). 제가 잡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례로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설명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우리의 경험을 배우고 싶어 하는 국가들이 많다.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전문가들과 화상 회의하겠다, 만나게 해달라, 보내달라 이런 요청이 많았는데 질병관리본부나 보건복지부, 감염병 전문가들이 굉장히 바빠서 다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웹 세미나라도 열어달라고 해서 최근 그런 자리를 다자 혹은 양자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정도의 관심과 높은 평가는 저도 외교부 경력이 26년 되는데 처음 느껴본다.

임승관:극적인 요소가 있었다. 90여 개 국가가 한국인 입국금지 조치를 해서 수모감을 느끼고 오리엔탈리즘적인 현실이 목격되다가 갑자기 처지가 뒤바뀌면서 영화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위험하다. 초기 서구 국가들이 방심하던 태도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경험을 소개하고 수출하는 일도 아주 타당하지만, 반면 달의 뒷면은 없을까. 방역에 성공한 국가건 반면교사건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이완은 어떻게 했지? 독일은 어떻게 했지? 이런 목소리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것 같다. 그러면 안 되지만 다른 나라의 어려움을 보면서 살짝 통쾌해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특히 일본을 볼 때 자꾸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김명희:일본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의료인 감염도 심각하다. 빨리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딜(deal)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다. 뉴스 댓글을 보면 “원래는 도와주는 걸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일본 정부 하는 꼴 보니 절대 안 돼” 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인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싶어도 정부 처지에서 쉽지 않겠다.

임승관:감염병의 특성상 타국을 돕는 건 인도주의이기도 하고 거기서 얻어지는 자부심이나 국제적 위상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돕는 일이다. 일본의 방역을 도우면 한국도 함께 안전해진다. 우리의 시야가 교정될 필요가 있다.

이준호:정부에서는 항상 다양한 검토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과정에서 한·중·일 간에도 보건협력 관련 소통을 하고 있다. 아세안+3의 3이 한·중·일이지 않나. 지역 내 보건위기, 식량위기, 기업인 입국 문제 등 여러 부분에 대해서 협의하고 있고, 앞으로 더 협의해야 할 문제도 있을 것 같다.

김명희:지난해 일본 오키나와에 견학을 가서 민주의료기관협의회라는 곳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마스크를 만들어 쓰고 쓰레기봉투로 방역복을 대신하고 있다고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우리 연구소에서 마스크라도 보내줄까 했는데 당연히 일회용(KF 마스크)은 금지되어 있고 면 마스크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었더니 “아베 마스크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라고 해서 마스크 두 박스를 주문했다. 그런데 오키나와로 가는 우체국 국제우편(EMS)이 아예 중단됐다는 거다. DHL은 간다고 해서 오늘 견적을 받았는데, 두 상자 배송에 90만원을 부르더라. 이처럼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연합뉴스3월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코로나19 공조 방안 모색을 위한 G20 특별화상정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교류가 막힌 상태에서 국제협력이라는 게 이뤄질 수 있을까?

이준호:포스트 코로나19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국제협력이 증진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 시각이 있는 반면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릴 거라는 견해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의료물품, 전략물자들을 다 막아버리고 동남아 국가에선 식량 수출제한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이 아무리 선을 그어도 바이러스는 얼마든지 국경을 넘어올 수 있다.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국제협력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확산될 것이다. 그런 결과가 나타나도록 한국 같은 개방형 통상국가, 중견국가가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이 유지돼야 국익도 도모할 수 있다.

임승관:끊어진 세계가 다시 이어질 때 한국이 유리해진 입장에서 순위를 앞서기 위한 방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취약국과 개발도상국, 특히 아시아 국가들을 돕는 데에 정부가 더 많은 관심과 역량을 쏟아주길 바란다.

이준호:동의한다. 다른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중견국가로서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각국의 협력을 이끄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국제협력 속에 국익이 증진될 수 있다.

임승관:K방역의 대표상품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물자다. PCR(진단검사 키트)이나 IT 플랫폼으로 만들어낸 것들이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연결시키고 싶을 거다.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어떤 의제가 열리는 공간에서 굳이 그런 것들을 앞에 너무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질서 안에서 우리가 평화, 연대를 이야기하고 그런 걸 만들어낼 역량이 있는 국가임을 보여주고 그 가치를 앞에 내세우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자랑스러울 것 같다. 좋은 기회이지만 꼭 ‘성장’ ‘동력’ 이런 말이 언론에 너무 많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각자도생이 아닌 협력하는 새로운 세계화의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이준호:역세계화와 재세계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지금 당장 나타나고 있는 모습은 배타주의, 보호주의, 국가주의 같은 역세계화이다. 그렇지만 향후에는 감염병뿐 아니라 기후변화, 인권, 식량위기 같은 글로벌 재해를 다루기 위해서도 다자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여론이 증대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도 EU 회원국들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을 논의 중이고, G20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명희:아이러니하게도 WTO(세계무역기구) 체제 이후 진보 시민사회는 세계화가 국가의 주권을 보장하고 내부의 민중을 보호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국가 간 경계를 허무는 신자유주의 방식을 상당히 비판해왔는데, 어느 순간 보니 많은 국가들이 민족주의나 자국 우선주의로 바뀌었다. 오히려 진보 시민사회가 국경을 넘은 협력을 더 주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 세대의 세계화는 예전과는 달라야 한다. 무역장벽을 허물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코로나19 관련 방역 기술과 지식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새로운 세계화의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임승관:코로나19가 이제까지 주로 북반구 국가들을 휩쓸고 지나갔다면 그다음에는 남반구 국가들일 수 있다. 가까이 인도, 타이도 있다. 정부의 아세안+3 협력 같은 모습을 보면서 무척 기뻤다. 그런 부분을 한국 정부가 더 강조해주면 글로벌 리더의 품격이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인데, 그 기회가 언제나 계속 열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국경없는의사회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취약국의 방역을 어떻게 도와주지? 어떻게 가르쳐주지?’ 하는데 그 생각은 잘못된 거야. 한국도 그 나라들과 대화하면 배울 게 있을 거야.” 한국이 했던 일은 의료자원 수요가 공급을 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성공한 방법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콜레라가 유행할 때 병상이 없으면, 링거가 없으면 어떻게 할지 등에 분명 노하우가 있다. 한국이 경제적·방역적으로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듯하지만 대화하면 서로 주고받을 게 있는 법이다.

김명희:저개발 국가들은 사실 K방역 모델을 쓰기가 어렵다. 감염병 확산 추적이 가능한 IT 인프라도 없고, 진단키트를 100만 개 보낸다 한들 이를 안정적으로 검사할 수 있는 전기와 인력도 없다. 그들의 인프라를 고려해 어떤 적정 기술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궁리해야 한다.

임승관:‘우리는 다 알고 있어, 가르쳐줄게’라는 관점보다 같이 고민하고 돕겠다는 연대 의지를 표명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적극 협력해서 이제 좀 스케일이 다르게 국제 보건의료를 지원하는 인력풀을 양성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연구소 만들고 파견 보내 훈련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자원을 남북관계에서 쓸 수도 있고 동남아 국가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 감염병 대응 자원 확충을 연구할 때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같이 쓴다고 상상하면 다른 외교 전략이 나오지 않을까. 특히 중국과 일본이 냉전을 벌이고 있는데, 한국 정부가 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일본에도 아량을 베풀며 아시아 평화 정치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줘도 좋겠다.

이준호:단기적으로 코로나19 방역, 중기적으로 세계 경기침체가 지속될 때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 장기적으로는 포스트 코로나 상황의 국제 연대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전반적인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임 원장이 이야기했듯 기회의 창이 열려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위기가 또다시 닥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외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준호:새로운 감염병일 수도 있고 사이버 테러일 수도 있고, 앞으로 이런 신흥 안보 이슈가 생각보다 자주 닥칠 것이다. 기존에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이런 큰 위기 속에서 한국 외교가 어떻게 대응할지, 국제사회에서 어떤 어젠다를 설정해나갈지 이번에 한 차례 경험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큰 감염병이 지날 때마다 국제사회에 큰 자국을 남겼다. 코로나19도 이 세계에 큰 자국을 남길 거다. 국가 간 관계, 국제사회 협력에도 뉴노멀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임승관:세계사가 2020년을 기록할 때 어떤 모습일까.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 연결하고 연대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 더불어 이 지면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우리 안에서 외국인들,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하고 있는지, 그런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외교다. 모두가 방역의 주체이듯, 국민 개개인 모두가 외교관이 될 수 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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