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2016년 2월 앙골라의 한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황열병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1781년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자메이카로 가던 노예 운송선 종(Zong) 호에 문제가 발생한다. 식량이 떨어졌고 좁은 배 안에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마저 돌았지. 종 호는 노예들이 해상에서 죽을 경우 한 명당 보험금 30파운드를 받는 보험에 들어 있었어. “다만 병으로 죽거나 자살한 경우는 해당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를 살해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배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던진 경우에만 보험금 청구가 가능했다(〈조선일보〉 2011년 1월15일).” 종 호의 선장은 무려 노예 122명을 생으로 바다에 집어던지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지.

여기서 잔인한 학살의 원인 중 하나였던 전염병에 주목해보자. 최소한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이 강제로 신대륙으로 실려 갔으니 그들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에 걸리기도 했을 테고, 동시에 아프리카 특유의 풍토병을 다른 지역에 퍼뜨리는 전염원(源)이 되기도 했어. 그 가운데 황열병(yellow fever)은 대표적인 경우였지.

황열병은 가히 세계사를 바꾼 병 가운데 하나야. 세계 최고의 정복자를 무찌르고 한 나라를 독립시키는 데 공을 세운 병이기도 하지.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는 사탕수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식민지였어. 이 섬에 끌려왔던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아이티 혁명을 일으키지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자신의 매제인 르클레르와 수만 대군을 보내 아이티를 재점령해. 당시 프랑스군은 실로 무서운 적과 맞닥뜨리는데, 바로 황열병이었지. 아이티 흑인 군대의 무력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은 황열병에 대한 면역을 지니고 있었고, 유럽 대륙에서 갓 도착한 프랑스군은 볼링 핀처럼 픽픽 쓰러졌던 거야. 결국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아이티는 독립을 쟁취했단다.

아이티에 살던 백인 농장주 등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1793년 미국의 임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 황열병 대유행이 벌어지기도 했어. “3개월 만에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비롯하여 공포에 질린 2만여 명이 도시 밖으로 피신하면서 정부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티머시 C. 와인가드, 〈모기-인류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살인자〉).” 미국에서만 1668년부터 1893년까지 무려 132차례나 황열병이 발생했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삼켜버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20세기의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황열병의 윤곽조차 잡지 못했어. 그저 비위생적인 환경과 ‘나쁜 공기’ 때문에 발병할 것이라는 추측에 갇혀 있었지.

1881년 쿠바의 의사 핀레이는 빨간집모기가 발견되는 곳에는 황열병이 발생하고, 모기가 살 수 없는 추운 계절에는 황열병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에 착안해 모기가 황열병을 옮긴다는 가설을 세웠어. 핀레이는 모기로 하여금 황열병 환자를 물게 한 뒤 건강한 사람을 다시 물게 하는 대담한 실험을 했지만 결과는 꽝이었어. 자원자 중 누구도 병에 걸리지 않은 거야. 모기 매개설은 웃음거리가 됐지. 미군 군의관이며 ‘황열병 대책위원회’의 책임자였던 월터 리드는 미시시피의 검역관 카터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 황열병에 걸린 환자가 탄 배가 정박하고 12일에서 21일쯤 지난 뒤에야 인근에 황열병이 발병하더라는 것이었지. “혹시 그게 일종의 잠복기(모기가 체내에서 병을 옮길 정도의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기간)가 아닐까요?”

ⓒWikipedia미국 의사 제시 러지어는 모기의 황열병 전파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병에 걸려 숨졌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그런 정보가 있었으니 월터 리드 이하 황열병 대책위원회는 모기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지원자들이 모기에 물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황열병 대책위원회 소속이던 내과의사 제시 러지어는 두 사람을 모기에게 물려보도록 했어. 그중 한 명은 별 증상이 없었지만, 다른 한 명은 발병해서 죽을 뻔했지. 이제 세 번째 실험을 해야 했어. 실험 대상은 러지어 자신이었고.

언젠가 얘기했지만 콜레라 세균 같은 건 없다고 굳게 믿어 콜레라 배양액을 벌컥벌컥 들이켠 과학자가 있었어. 그의 만용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러지어는 무시무시한 황열병이 자신에게 침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어. 그래도 그는 모기에게 팔뚝을 내민다. 1900년 9월13일 오전이었지. 그로부터 5일 뒤 황열병 증상이 나타났을 때 러지어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써. “이제 병균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고 믿어. 하지만 말해서는 안 돼. 단서조차도 말하지 마.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거든(레슬리 덴디·멜 보링, 〈세상을 살린 용기 있는 10명의 과학자들〉).”

러지어는 의사들이 그때까지 보아온 황열병 증상 가운데서도 극악한 증상에 시달리다가 발병한 지 단 일주일 만에 속절없이 숨을 거두고 말아. 혼자 끙끙 앓으면서도 그는 몸의 변화를 기록해뒀어. 황열병 대책위원회 월터 리드 위원장은 그의 메모를 바탕으로 끈질긴 연구를 거듭했고, 또 러지어의 죽음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다음 자원자들이 뒤를 이어 모기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었단다.

마침내 모기가 황열병의 매개라는 사실이 거의 입증됐지만 사람들은 쉽게 기존 인식을 바꾸지 않았어. 황열병에 걸린 자원자를 돌보던 간호사는 월터 리드에게  “환자가 고열에 들떠 이 병은 모기에서 온 거라는 등의 ‘미친 소리를 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게리 클라인, 〈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 그때 월터 리드의 표정은 어땠을까. 간호사뿐이 아니었어. 미군 의무사령관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고개를 외로 꼬았고, 〈워싱턴포스트〉는 “(모기 매개설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멍청한 이론”이라고 공격했다. 결국 황열병 대책위원회는 불결한 환경과 오염된 물건 접촉을 통해 병이 옮는다는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 또 한 번의 인체 실험을 강행해야 했어.

자원자들은 감염자의 땀과 피, 토사물까지 범벅이 된 침대보와 베갯잇, 담요로 침대를 꾸미고 빨지 않은 환자복을 입은 채 35℃를 유지하는 오두막에 격리된다. 모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창문도 꽁꽁 닫아야 했겠지. 격리된 자원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이번에는 아예 환자의 피가 묻은 수건을 베고 잤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덥고 냄새나고 불결한 오두막에서 ‘자가격리’가 끝난 순간 그들은 ‘유레카’를 외치지 않았을까.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었으니까.

기억하자.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병마를 확인하고 마치 보물이라도 캔 듯 아내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고 흥분했던 의사 러지어, 뿌리 깊은 편견을 깨기 위해 황열병 환자의 피칠갑을 두르고 찜질방 같은 숙소에서 3주를 버틴 자원자들. 이들 덕분에 세상은 밝아져왔다. 며칠 전, 코로나19와 치열한 전투 중인 명지병원의 간호사 두 분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중 한 분은 주임 간호사인데 “책임감 때문에 확진 판정 후 입원해서 펑펑 울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코로나19에 걸려서 두려운 게 아니라, 정체 모를 병에 위협받을 것이 겁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질병과의 전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운, 그토록 책임을 다해왔으면서도 더 책임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저 마음이 바로 러지어와 그 일행들의 마음 아니었겠니. 성경 말씀에 범사(凡事)에 감사하라고 했던가. 아빠는 네게 이렇게 말하고 싶구나. 우리의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역사에 감사하자.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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