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글쓰기 합평회 ‘하마글방’을 운영 중이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글을 써?” 그는 왜 사람들이 돈까지 내가면서 글방 밖에서는 읽힐 일도 거의 없는 글을 쓰느라 애쓰는지 궁금해했다. 질문 뒤에는 이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돈도 안 되는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모든 사람이 꼭 쓸모와 관련된 일을 하는 건 아니야”라고 가볍게 대답했지만, 덕분에 나는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왜 때로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는 일을 할까. 이를테면 왜 알아주는 사람보다 비난하는 사람이 많을 걸 알면서도 페미니즘 운동을 할까. 이득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는 선택은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이기 쉽다.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쓸모를 입증해 보이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정당화할 수 있는(최소한 경제적인) 논리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효용을 목적으로 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포와 혐오는 어느 때 생기는가

고민에 힌트를 준 것은 의외로 코로나19였다. 이때다 싶어 인종주의적 혐오를 드러내고 공포를 부추기며 마스크를 사재기하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실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재난 앞에서 악한 행동을 한다.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고 사회가 마비될 거라고 믿을 때 평소보다 더 많은 식료품을 사들이고, 마스크 100개를 쟁여두고선 마스크 1개를 갖기 위해 싸운다. 공포와 혐오 역시 실제로 상대방이 무엇을 했느냐보다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다.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온갖 예측이 난무한다. 예측은 객관성의 탈을 썼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말하는 사람이 가진 믿음과 의지를 깊이 반영한다.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다’라는 말에는 기후변화를 막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은 공정한 세상을 만들 의지가 없다는 말이다. 믿음은 자기실현적인 속성이 있다. 특정한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궁리하면서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 믿음이 곧 변화의 시작이다.

프랑스 의학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은 병리, 건강, 정상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는 병리가 아닌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건강은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새로이 적응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기준을 계속해서 정립해가는 것이다. 캉길렘은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생명체 역시 환경에 맞춰 생명의 규범을 계속해서 새로이 갱신한다고 보았다. 만약 어떤 생명체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하나의 규범에 갇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캉길렘이 정의하는 병리 상태다. 만약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전 규범에 갇혀 지낸다면 그것이야말로 병리 상태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처음 말할 때 ‘용기’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실제로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했다.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 나를 여전히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줄지 말이다. 이제 나는 믿음을 말하고 싶다. 다음 사람이 그렇게 큰 용기를 낼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하나씩 믿음의 증거를 만들어가야 한다. 욕망과 이기심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다는 믿음,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또 나도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공동체로서 살아간다는 믿음, 그리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성찰하고 새로운 규범을 탐색해가는 글쓰기에 대한 믿음 말이다.

기자명 하미나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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