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피에르 푸아브르는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향신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존버’라는 말이 있다. ‘존재를 걸고 버티다’라는 의미다. 요즘처럼 미증유의 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지속될 때, 저마다 ‘존버’하는 것 외엔 답이 없다. 이것을 해낸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보상을 받기도 한다. 영원할 것만 같던 네덜란드의 향신료 독점 체제에 구멍을 내고, 결국에는 무너뜨린 남자의 삶도 이를 증명하는 좋은 예다.

피에르 푸아브르(1719~1786)는 프랑스 리옹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향신료와 관련된 일을 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의 성 ‘푸아브르’는 프랑스어로 ‘후추’를 의미한다. 그는 프랑스 외방전도회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고, 스물한 살에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첩자 혐의로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이후에도 감시와 냉대를 견뎌야 했다. 심지어 상급자인 광저우의 수도원장에게도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본국으로 보내졌다.

어린 시절부터 꿈꾼 아시아 선교 활동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가 승선한 프랑스 화물선이 수마트라 동쪽 해안에서 영국 군함과 마주친다. 당시에는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의 배와 마주치면 전투를 벌여 화물을 빼앗았다. 교전이 일어났고 푸아브르는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영국 군함 위였다. 오른손은 사라진 채였다. 총탄에 맞아 썩기 시작하자 영국 군의관이 수술로 절단했다. 영국인들은 그를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식민지의 수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운명에 쉽사리 무릎을 꿇지 않았다.

중국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중국어를 익혀 스스로를 변호할 정도였다. 물산이 풍부한 중국 남부 지역을 여행하며, 아시아의 식물과 향신료 산업에 눈을 떴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인’ 향신료 독점 체제를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정향, 육두구 같은 고가 향신료는 각각 하나의 섬에서만 재배하도록 했다. 나머지 섬의 향신료 나무 숲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정기적으로 순찰하며 다시 자라나고 있는 묘목마저 씨를 말리는 정책을 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였다.

푸아브르는 이러한 향신료 제국의 심장부에 4개월간 머물며, 네덜란드 상인들과 친해진다. 그는 상인들로부터 육두구와 정향의 재배 현황, 암시장의 존재 유무, 탈세와 암거래 방법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 아마 붙임성이 좋은 천성에 뛰어난 외국어 학습력이 한몫했을 듯싶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바타비아에서 보낸 생활을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시 네덜란드 세력이 향신료를 독점하게 된 이유가 다른 무역국들의 무지와 용기 부족 때문임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이를 깨닫고, 지구 한편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항구적인 부의 원천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나눌 만큼 대담하기만 하면 되었다.”

해적에게 납치되고, 영국 포로가 되었다가 겨우 귀향

이렇게 마음먹기와 실제로 일이 풀리는 것은 별개다. 그는 바타비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프랑스 해적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그를 태운 해적선이 영국 사략선에 나포된다. 결국 그는 영국 포로가 되어 섬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가 1748년 겨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은, 그가 이런 일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바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온 쪽을 향해 다시 머리를 돌리고 몸을 웅크린 채라도 나아가는 것. 내가 이해하는 ‘존버’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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