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장기려 박사의 친손자인 장여구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교수(위)는 블루크로스의료단장을 맡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한국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주목받고 있다.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는 1968년 설립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부산 고신대학병원 장기려 박사(1911~1995)가 1968년 내건 표어다. 평양 김일성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였던 장기려는 한국전쟁 중에 내려왔다. 이때부터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 사업을 벌이는 데 몰두했다. 간장외과 분야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이면서도 급여를 환자 치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며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쳐나갔다.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창시자 장기려가 1995년 타계한 뒤 그의 제자들은 ‘블루크로스(청십자)’ 운동으로 스승의 정신을 계승했다. 현재 친손자인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장여구 교수(56)가 ‘장기려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4월10일, 코로나19 방역 현장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장여구 교수를 만났다.

장 교수는 “할아버지는 피란 시절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료 진료를 폈는데 결국 병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 다음 단계로 모금함을 설치해서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 진료비를 내게끔 하다가 그것으로도 한계에 봉착하니까 의료보험제도를 고안했다.” 당시 비교적 의료복지 제도가 발전한 북유럽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온 사회복지사업가 채규철씨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의 처음 보험료는 60원, 당시 담배 한 갑이 100원 하던 시절이니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뒷말이 돌았다. “사람들이 ‘장기려 박사가 사기를 치려면 크게 치지 60원씩 받아서 돈 없는 사람들한테 그걸로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고 수군댔다.” 장기려는 굴하지 않고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꿋꿋이 유지했다. 1975년에는 부산에 청십자병원까지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다.

“할아버지의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 크니까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롤모델로 삼아서 대기업, 공무원, 사립학교 교원 등 일부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장여구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장가용 박사를 이어 3대째 의사 집안이다. 1964년에 태어나 장기려 품안에서 큰 그에게 남은 할아버지의 추억은 무엇일까. “저한테는 그저 ‘물건 아껴 써라’ ‘음식 남기지 마라’고 잔소리 많이 하시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항상 환자를 불쌍히 여기며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갖춘 의사가 되거라’는 한 말씀만 하셨다.”

장기려는 인술, 봉사, 박애, 무소유를 실천한 사회봉사자라는 이미지에 비해 실제 의사로서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인술만큼이나 의학자로서의 업적도 뛰어났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경성의전에서 만난 스승이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 꼽히던 백인제 교수였다.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에서 장기려는 백인제 교수로부터 당시 위험한 병으로 꼽히던 충수염을 연구과제로 받았다. 1936년까지 4년간 약 270건의 실험을 진행한 결과,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채 10명도 되지 않았던 조선인 의학박사 중 한 명인 장기려를 두고 주변에서는 모두 그가 의과대학 교수와 같이 성공이 보장된 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승 백인제 교수는 장기려에게 대전병원 외과과장직을 제안하며 연구를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러나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보내고 싶었던 장기려는 교수직과 대형 병원행을 거절하고, 가난한 환자들이 많은 평양의 기독교병원을 택했다. 그러던 중 8·15 광복에 뒤이어 남북이 분단되었다. 1947년 평양의대(김일성대 의과대학 전신)가 들어섰다. 장기려는 평양의대 외과과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 주석 주치의가 됐다.

“6·25전쟁 나기 전에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맹장염에 걸려 할아버지를 찾았는데 하필 일요일이라 교회 예배 중이었다. 시간을 화급하게 다투는 수술이라 결국 김일성 주석은 고문단으로 평양에 나와 있던 소련군 군의관에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도중 할아버지가 들어가 참관하셨는데 하도 많이 절제를 하는 걸 보고 김일성 주석에게 ‘소련 의사는 기술이 좋을 줄 알았는데 나 같으면 저렇게 수술 안 한다’고 한마디 해줬다고 하시더라.”

ⓒ고신대복음병원 제공생전의 장기려 복음병원장(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입원환자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교회 창고 빌려 무료 진료 시작

김일성 주석이 아끼던 북한 최고 외과의사의 운명은 한국전쟁과 함께 소용돌이쳤다. 평양의대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장기려는 1950년 말 평양을 수복한 국군과 유엔군에게 붙잡혀 국군 야전병원에서 국군 치료를 맡았다. 장기려는 후퇴하는 국군 호송차량에 타기 전 집에 전화해 옷가지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당시 평양에는 장기려의 부인과 자녀 5명이 살고 있었다. 그때 옷을 챙겨 온 이가 둘째 아들 장가용(장여구 교수 부친)이었다. 혼란 속에 국군 호송차는 부자를 싣고 남쪽으로 달렸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북한은 장기려가 국군에 납치됐다며 송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장기려 앞에는 전쟁의 참화와 병마에 시달리는 피란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951년 10월,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부산에 있는 교회의 창고를 빌려 ‘복음진료소’란 이름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유엔에서 대형 천막 세 개를 장기려에게 지원했다. ‘천막병원’에 각각 진료실·수술실·입원실을 꾸몄다. 그는 이 천막병원에서 무려 6년 동안 매일 1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 부산 시민들은 전쟁 내내 무료로 진료해준 장기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신뢰를 담아 병원 건립 모금운동을 펼쳤다. 1956년 10월 천막을 걷고 새 건물을 세워 현대식 대형 병원인 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신축했다. 장기려는 환자들만이 아니라 병원 직원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병원 직원은 가족 수대로 월급을 가져갔다.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송 기사님 가족이 10명이라 가장 월급이 많았고, 그다음으로 할아버지 의형제였던 전종인 교수님도 자녀가 많아서 두 번째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랑 두 식구라서 월급을 적게 받으셨다.”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9년 장기려는 간우엽절제수술(간 대량 절제수술)을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 “할아버지라는 친분 관계를 떠나 같은 의사로서도 가장 존경한다. 의료 기계가 낙후된 1950년대 상황에서 한국 최초로 간 절제술을 시도하고 성공했다는 게,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하니까 좋은 얘기도 들었지만 반대 시각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현재 국내 간 의학계는 장기려가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한 10월20일을 ‘간의 날’로 지정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장기려에게는 오랜 회한이 남아 있었다. 스승 백인제 교수의 뜻을 거절한 데 대한 후회였다. 백인제 교수가 주선한 대전병원 외과과장을 거절하고 평양으로 떠난 뒤 장기려는 스승이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속죄의 뜻으로 부산에 스승 이름을 딴 대학병원(인제대학 백병원) 설립허가를 위해 적극 나섰다. 부산에 고신대병원과 인제백병원이 나란히 들어서게 된 사연도 거기서 비롯된다. “1979년 할아버지는 고신대학 병원과 인제대학 백병원을 동시에 설립허가 해달라고 문교부에 서류를 제출했다. 두 병원 모두 주도적인 설립 추진자로 본인 이름을 올리셨다. 결국 문교부에서 2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설립허가를 내줘 할아버지의 소원을 푸셨다.”

장기려는 눈을 감던 1995년까지 이산의 한을 풀지 못했고 정보기관의 감시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1970년대 우리 집으로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에 있는 작은아버지(장기려의 셋째 아들)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고민하다가 경찰에 신고했더니 대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정보부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온 가족이 섬뜩했다. 정보부가 이미 다 알고 가족을 시험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장기려 가족을 상시 감시했다. 북한의 납치에 대비한 보호 명목이었다. “정부는 특히 일본에 못 나가게 했다. 다른 나라에도 아버지하고 할아버지하고 같이는 못 가게 막았다. 부자가 동시에 납치되면 골치 아파진다고.”

북한은 장기려 송환에 사력을 다했다고 한다. 아내와 남은 자식들이 북한 방송에 나와 송환을 호소하기도 했다. “근데 더 웃긴 건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고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방송에서 떠든 것은 우리 뜻이 아니다. 우리도 시켜서 한 거니 남쪽 가족들이 이것 때문에 문제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 오해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북한에서 장기려의 가족은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큰아들은 인민군에서 의무장교로 상장까지 지냈고, 큰딸은 식료품 공장 총지배인, 작은딸은 평양 암연구소 연구원, 셋째 아들은 평양의대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 손자 21명 중 중 15명이 의사가 되었다고 하더라.”

이런 사정 때문에 장기려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의 꿈을 끝내 못 이뤘다. 대신 그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감지한 장기려는 1990년대 들어서는 주변에 방북의 꿈을 자주 털어놓았다고 한다. 북한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송환하자 장기려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 이후 할아버지가 북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난 여기서 이만큼 살았으니 만약 북쪽에 가면 안 내려오고 그냥 살겠다고 하셨다. 그러시다가 끝내 고향을 못 보고 1995년 크리스마스에 돌아가셨다.”

평생 병원 옥상 사택에서 기거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않고 부산 고신대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던 장기려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숭고한 삶과 인생 역정은 의료계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행려병자의 아버지’ ‘성스러운 산(聖山)’ ‘바보 의사 장기려’ 등으로 불리며, 아시아의 노벨상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그를 ‘과학기술유공자’ 로 지정했다.

장여구 교수의 아버지(장가용 박사)도 기초의학을 전공한 뒤 평생 봉사의 길을 걸었다. 사랑의 장기기증본부 설립에 앞장선 뒤 2006년 작고할 때까지 장기기증 운동에 평생 몸담았다. 장여구 교수도 블루크로스의료단장을 맡아 40여 명의 의료진들과 함께 국내뿐 아니라 매년 캄보디아·라오스·필리핀 등을 돌며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손자로서 무료 진료 봉사활동에 나서지만 규모가 커지면서 늘 재정난에 허덕인다. 장여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 병원들이 대한민국 의료계를 흔들고 있는데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공공의료의 왜곡 현상도 바로잡히기를 기대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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