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2월6일 타이 보건부 산하의 공공제약사에서 판매하는 보호마스크와 세정제를 사기 위해 방콕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는 마스크나 손소독제 같은 의약외품이, 유행이 본격화된 뒤에는 진단키트나 인공호흡기 같은 의료기기의 생산·공급 문제가 대두했다. 유행이 장기화되면서 이제는 치료제나 백신 같은 의약품의 생산·공급 문제가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조금씩 성격은 다르지만, ‘보건의료 기술(health technology)’의 생산·공급 문제라 할 수 있다.

지난 1월 말~2월 초 2주 동안 타이 방콕에 출장을 다녀왔다. 타이는 중국 밖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최초로 발생한 국가여서 동료들의 걱정이 컸다. 첫 일주일은 타이 왕실이 개최하는 연례 국제보건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공중보건 전문가들과 각국 보건부 고위급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타이 공주도 개회식에 참석했다. 하루는 내가 묵던 호텔 로비에 각국 깃발을 꽂은 검은 세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도 보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들이 예정대로 참석한 데는 당시 코로나19 유행이 아직 심각하지 않았고, 타이의 공중보건 역량과 공적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깊은 신뢰도 한몫했다. 타이의 보건의료 체계는 공공 중심이고(전체 병상의 79%), 공공병원은 미등록 이주민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한다. 보건부 산하의 공공제약사 GPO(Government Pharmaceutical Organization)는 필수의약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하여 공공병원에 공급한다(전체 판매의 90% 이상). 민간 제약사가 공급할 때보다 예산을 40% 절감하고 있다.

둘째 주에는 공적 운영으로 유명한 타이 의약품 생산 체제를 조사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타이 보건부는 특허권을 가진 초국적 제약사들이 매긴 HIV/AIDS 치료제, 항암제, 고지혈증 치료제의 가격이 정부와 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며 ‘강제실시(특허권자의 의사와 무관한 실시)’를 발동하고 공공제약사 GPO를 통해 적정가격의 제네릭(원개발 의약품과 동일한 성분 및 효과를 가진 후발 의약품)을 직접 생산하거나 수입했다. 미국과의 무역마찰 우려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접근성을 보장하는 무상의료 체계에 해당 의약품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등이 비슷한 정책을 폈다.

GPO를 방문했을 때 인상적인 건 1층에 위치한 GPO 약국, 즉 공공약국이었다. 언뜻 한국의 대형 약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그날 눈길을 끈 것은 길게 늘어선 줄과 방송국 인원이었다. 동행한 통역에게 물으니 곧 시작될 ‘공적 마스크’ 판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무료로 나눠주는 건가 했으나 그건 아니고, GPO가 민간 생산업체에서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납품받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거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은 타이 정부가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가격관리 품목으로 지정하고 생산·판매·수출을 통제하겠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에서 비슷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라고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AP Photo쿠오모 뉴욕 주지사(왼쪽)는 주 내 모든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을 중앙에서 통제하기로 했다.

타이의 공공제약사와 공공약국

GPO 약국에는 GPO가 직접 생산한 의약품과 의료용품뿐만 아니라, 민간 의료용품 업체나 제약사가 생산한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다. 동행한 타이인 직원은 다른 약국보다 가격이 훨씬 싸다며 3M 알코올 스왑(일회용 소독솜)을 잔뜩 샀다. GPO가 생산하는 의약품들은 필수의약품이며 그 가격이 매우 싸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GPO는 이런 약국을 전국에 가지고 있다. 공공제약사와 공공약국은 사실 그동안 한국에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도 잘 다루지 않았던 주제이다.

한국에서는 1월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보고되고 일주일 만인 1월28일에 감염병 위기경보가 ‘경계(제한적 전파)’ 단계로 격상됐다. 이즈음 마스크와 손소독제 품귀 현상과 가격 급등, 이른바 ‘마스크 대란’이 시작됐다. 처음에 정부는 일단 시장질서에 맡기고, 최소한의 역할만 하려 했다. 품귀 현상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공적 생산·유통·분배를 선언했다.

한 달 넘게 지속된 마스크 대란과 정부의 대응은 돌고 돌아 결국 내가 한 달 전 타이에서 경험한 공적 통제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평소에 복지 확대를 소리 높여 반대하던 사람들조차도, 공급하는 마스크 물량이 적다고 정부를 비판할지언정 국가의 직접적인 시장 통제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왜 국가가 나서야 하는지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또 요구하고 있다.

마스크 대란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4월2일과 3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해 3M에 N95 마스크 생산을 확대하고 캐나다와 중남미 국가로의 마스크 수출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간호사 수천 명이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캐나다-미국) 국경을 넘는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3M 마이클 로먼 CEO는 “미국이 수출을 중단하면 다른 나라들도 똑같이 보복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실제로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마스크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방물자생산법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방물자 조달을 위해 제정되었고, 현재 마스크·장갑·가운 등 의료용품뿐 아니라 인공호흡기 같은 의료장비에도 발동된 상태이다. 제너럴모터스, 포드, 테슬라 등 자동차 회사가 제너럴일렉트릭, 메드트로닉 등 의료기기 회사와 협업으로 인공호흡기 개발에 착수했다.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곳에서 최근 단 몇 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뉴욕주의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는 “다른 50개 주와 이베이(인터넷 경매)를 하는 것 같다”라며, 연방정부에 마스크·장갑·가운·인공호흡기 등 의료용품과 장비 구매 및 공급을 ‘국유화’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은 아직까지는 민간 유통업자들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보지만, 과연 이 입장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월30일, 쿠오모 주지사는 주 내 모든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을 통제하는 단일 시스템을 발표했다. 환자 이송은 물론 장비와 인력을 모든 병원이 공유하며, 우선순위에 따라 자원을 중앙에서 통제하게 된다.

우리는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공공병원 확충을 떠올린다. 공공병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한국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반면 보건의료 기술, 특히 최신 진단기술이나 치료제에 대해서는 ‘혁신’을 강조하며 시장에 맡겨놓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왔다. 국가가 마스크 유통까지? 의약품, 인공호흡기도 국가가 통제해?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이러한 익숙함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최고의 기술 수준을 지녔다는 미국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다(4월9일 기준). 의료보험이 없는 9% 인구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비용 걱정으로 진단검사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검사나 치료를 할 의료 인력과 기술도 부족하다. 그간 보건의료 체계를 민간에 맡기고, 공공에는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례는 기술이 있어도 그것을 모두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이의 사례는 기술의 공공성이 공공병원, 나아가 전체 보건의료 체계의 공공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공제약사를 통한 공적 생산, 공공병원과 공공약국을 통한 공적 공급은 타이의 보편적 무상의료 체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한국은 전 국민을 포괄하는 건강보험이 있지만, 약제비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보건의료 체계가 압도적으로 민간 위주(전체 병상의 90%)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가격통제에도 불구하고 사용량이 너무 많아 효과가 없다. 제한된 재정으로 급여를 보장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접근성이 저해되기도 했다.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불만족한 초국적 제약사가 수차례 공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002년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가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2008년 스위스 제약사 로슈가 HIV/AIDS 치료제 푸제온을 공급 거부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제네릭 생산·수입을 위해 두 경우 모두 강제실시를 청구했지만, 특허청에 의해 번번이 기각당했다. 최근에도 2018년 프랑스 제약사 게르베의 간암 치료제 리피오돌 공급 거부, 2019년에는 미국 의료기기사 고어의 소아 심장수술용 인공혈관 공급 거부를 겪은 바 있다. 두 경우 모두 업체가 요구하는 대로 가격을 인상해주고 나서야 공급이 재개됐다.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의 경우, 정부는 개발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서울대병원 등 코로나19 환자 치료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공공병원들은 기존 의약품의 코로나19 치료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수행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질본) 등 여러 부처는 민간에 연구개발 자금을 조달하거나 산하 공공연구기관을 통해 직접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산자부와 질본 산하에는 민간기업의 개발과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의약품과 백신을 위탁 생산하는 공공 생산시설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지원을 받은 국내 기업이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모두 개발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설사 개발한다 해도 민간기업이 건강보험과 개인이 감당할 만한 가격으로 충분한 양을 안정적으로, 적시에 공급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마스크나 손소독제 같은 품귀 현상, 가격 급등이 없을까?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4월9일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 관련 합동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의 행태

2005년 조류 인플루엔자와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 당시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전 세계적 공급부족 경험을 되돌아보자. 당시 타미플루의 특허권자인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전 세계적 필요량을 적시에 생산·공급할 역량이 부족했지만 특허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도 WHO 권장 비축분(인구의 최소 20%)을 구비하지 못해 시민사회는 정부에 강제실시를 요구했다. 하지만 국내 민간 제약사 중 어느 한 곳도 직접 강제실시 청구를 하지 않았고, 특허법상 정부에 의한 직접 실시 요건을 만족하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만 일었을 뿐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강제실시를 위해서라도 공공제약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후 힘을 얻게 됐다. 당시 타이에서는 공공제약사 GPO가 제네릭을 생산해 공급했다.

코로나19의 유력한 치료제로 다국가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렘데시비르 사례는 타미플루 사태가 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 렘데시비르의 특허권자인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는 미국 내 코로나19 환자 수가 늘어나기 전에 급히 희귀의약품 지정 신청을 했고(희귀의약품 지정 기준은 미국 내 환자 수 20만명 미만이다), FDA는 이를 승인해줬다. 희귀의약품 지정은 희귀질환 치료제의 연구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로, 7년간의 시장독점권과 세액공제, 신속승인 등의 혜택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길리어드가 렘데시비르에 대해 7년간 시장독점권을 갖게 되며,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경쟁사를 차단하고 높은 독점가격을 매길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정부가 강제실시를 할 수 있지만, 미국 희귀의약품법에 따른 시장독점권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에볼라 치료제로 개발된 렘데시비르는 이미 상당한 공적 지원 혜택을 받았고,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렘데시비르의 임상시험을 후원하고 있다. 신속승인 역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독점권을 연장하기 위해 제도와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을 악용했다는 전 세계 시민사회의 비판에, 길리어드는 FDA에 희귀의약품 지정 철회를 요청했다. 그러면서도 전 세계적 수요량 급증을 이유로, 임상시험 외 개별 환자에 대한 치료제 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치료제와 백신의 공적 생산 및 유통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상황에 직면해서 우왕좌왕하느라 시간을 버리는 만큼 안타까운 생명도 잃을 것이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이미 많은 국가는 강제실시를 발동했거나 준비 중이다. 알려진 나라만 해도 칠레·이스라엘·에콰도르·독일·캐나다가 있다. 유럽 시민사회단체들은 공적으로 자금이 조달된 연구개발의 결과물에 접근성 단서를 붙이는 법제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이미 의료용품뿐만 아니라 의약품에 대해서도 가격과 생산·공급 통제를 하고 있다. 스페인 시민사회단체들은 기존 공공 연구기관과 생산시설 활용을 포함하는 공적 생산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공공병원연합회, 보건의료 노조와 협회, 시민사회단체들도 공동으로 성명을 내 비슷한 조치를 정부에 요구했다.

코로나19 유행을 넘어서, 필수적인 보건의료 기술에 모두가 공평하게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 공적 생산·공급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을 이야기한다. 보건의료 기술의 생산과 공급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자명 김선 (보건경제학 박사·시민건강연구소 건강정책연구센터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