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열차는 만석이었다. 내 자리는 서로 마주보고 앉는 가족석이었다. 짐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앞에 마주앉은 사람이 내가 읽는 책 표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내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매가 더 부각됐다. 약간 찡그린 미간이 묻고 있었다. ‘당신 메갈이야?’ 책 제목이 더 잘 보이도록 표지에 닿은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뗐다. 〈김지은입니다〉. 그제야 남자가 눈길을 돌렸다.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2019년 3~4월을 견디던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온라인 어디에선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댓글들을 보았다. 마스크를 쓰고 숨어 다니지만, 저런 글을 쓴 사람과 마주친다면, (중략) 내 얼굴에 황산을 뿌린다면, 칼을 들이민다면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김지은씨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고, 친구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이모티콘을 쓰지 못하고 있고, 멤버십 회원 적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 ‘확인 차원에서 “김지은 회원님 맞으시죠?” 하고 계산대에서 이름을 불리는 일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숨 막힌다.’ 직원이 “김지은, 김지은”을 중얼거리며 옷을 찾는 그 잠깐 동안의 긴장을 견딜 수 없어서 세탁소에도 발을 끊은 지 오래다. 3년6개월 형을 선고받은 가해자는 안희정씨이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보호해야 하는 건 피해자 김지은씨다.

안희정씨가 형을 살고 나올 때쯤이면 세상이 바뀌어 있을까. 안씨가 세탁소를 못 가고, 그가 쓴 책을 읽는 사람이 눈 흘김을 받게 될까. 사실 가해자가 어떻게 살든 관심 없다. 그저 김지은씨가 마스크를 벗고, 다시 멤버십 적립도 마음껏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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