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10여 년 전 일이라 이젠 기억이 희미하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고 황유미 등 5명에 대한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에 시민단체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와 함께 피해자 측 추천 임시위원으로 참관한 적이 있다. 반도체 산업 공정은 베일에 싸여 있던 시절이라 외국의 학술 문헌, 피해자들의 수첩과 같은 자료들을 읽으면서 반도체 공정의 유해성을 검토했다.

황유미의 수첩에 ‘첫 월급, 빨간 내복’이라고 적힌 글자를 읽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평가위원회에서 산업안전보건공단의 부실한 조사 결과를 들으며 공공기관이 대기업의 작업환경을 제대로 조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기억한다.

한 방송국의 취재 자문 자격으로 그 공장을 순회할 기회가 있었다. 현장에 비치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읽어보았다. 이 자료는 노동자들이 취급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기본정보를 담고 있다. 자료의 대다수가 영업비밀이라고 표시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성분의 함유량이 수십 퍼센트인 자료들도 꽤 많아 깜짝 놀랐다.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산재를 모두 불승인했다. 행정소송 결과 두 명만 산재로 인정되었다. 상식적으로는 회사 측이 직업병이 아니라고 입증해야 하지만 국내법은 그렇지 않다. 1심에서 패소한 노동자들의 유해인자 노출량 추정을 위해 산업위생 전문가들과 함께 시뮬레이션 실험까지 해서 의견서를 또 냈지만 소용없었다.

2020년 2월 발효된 산업기술보호법은 ‘삼성보호법’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은 점점 늘어났다. 동료 전문가들과 함께 제보자 수백 명의 사례를 분석하고, 산재 신청자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를 검토하고, 방대한 학술 문헌을 고찰했다. 드물지만 산재 인정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사업주가 법에 따라 실시하고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는 작업환경측정 결과서나 유해작업 종사자에 대해 실시하는 검진 결과서에서 유해인자 노출이 확인된 경우였다.

대부분은 유해인자 노출을 입증할 길이 막막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수행한 국내 반도체 산업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서가 공개되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반도체산업협회에서 국립대학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보고서는 공개되지 못했다.

2018년, 황유미 사망 11년 만에 삼성전자는 공식 사과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 재발 방지대책을 약속했다. 반올림의 오랜 활동은 우리 사회의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보상 기준 변화를 이끌어냈고, 노동자가 아프지 않고 일할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2018년 고용노동부는 피해자들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작업환경측정 결과서를 공개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국가 핵심 기술을 포함한다며 그 공개에 반대했다.

그 무렵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116명은 노동자들의 건강 보호를 위해 이 작업환경측정 결과서 공개를 촉구했고, 산업보건 전문가 800여 명은 물질안전보건자료의 영업비밀 남용 비판 성명서를 냈다. 삼성전자는 공개를 막기 위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도 제소했다.

2019년 8월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2020년 2월 발효되었다. 정보공개 청구로 적법하게 제공받았어도 ‘산업기술을 포함한 정보’를 유출하면 강력히 제재한다는 내용이다. 앞으로 작업환경에 관한 공익적 문제 제기나 직업병 인정을 위한 정보수집도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권단체와 직업병 피해자들은 이 법을 ‘삼성보호법’이라 부른다. 국민의 알 권리와 생명건강권,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의 공정한 판결을 기대한다.

기자명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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