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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가 ‘한국식’ 코로나19 대응법을 모범 사례로 지목하고 한국 배우기에 나섰다. 다수의 시민들은 크고 작은 나눔과 연대를 통해 성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함으로써 불안하고 우울한 일상에 자부심과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섣불리 우쭐할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한 가지, 이런 다짐은 해두고 싶다. 더 이상 이른바 ‘선진국’을 쫓아가느라 허둥대지 말자. 차분히 공조하고 연대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 국가로 이참에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자는 것이다.

눈길을 돌리니 아프고 슬픈 사연 또한 속출하고 있다. 외면하거나 은폐돼온 우리 사회 민낯인데, 코로나19 사태로 도드라져 나온 것이다. 청도대남병원의 정신질환자 100여 명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수용소와 진배없는 폐쇄병동에 갇혀 살아온 이들은 재난 상황에서야 그 존재가 드러났다. 77세의 기저질환이 있던 이 병원의 간병인은 자신의 환자가 감염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간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사각지대는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다.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들은 위험이 상존하는 밀집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다수의 장애인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건강보험 가입이 힘든 미등록 이주자와 난민은 공적 마스크 지급 대상에서도 벗어나 있다.

수년 전 인권 실태 조사를 위해 한 콜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고 전용 헤드셋도 지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참담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걱정했는데 결국 콜센터가 집단감염되는 사태를 목도하게 됐다. 콜센터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마저도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존 C. 머터 교수는 재난이 결코 평등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고 설파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머터 교수의 주장이 어긋나지 않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지만 그로 인한 위험과 고통은 실제로는 취약한 이들에게 훨씬 더 위협적임을 위의 예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폭주하는 새벽배송을 하다 결국 명을 달리한 쿠팡맨 사례는 바이러스의 직접적 공격 없이 그 여파만으로도 고된 삶이 뿌리째 뽑혀버리는 아픈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자연적 사건이지만 이후의 상황은 순전히 사회적이다. 따라서 진단키트나 백신 개발 같은 과학적 대책만으로는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데 충분치 않다.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하여 재난에 대처하는 힘을 키우고 동시에 위태로운 이들의 삶을 지탱해줄 안전망 확보와 구조적 개혁을 통한 불평등 완화는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핵심 숙제다.

바이러스 차단과 인권 보장 사이의 균형 잡기

불안과 위험은 인간의 존엄이나 자유·평등·연대라는 인권적 가치를 허물어버리기 쉽다. 안전을 갈망하다 보면 과도한 국가적 통제와 사생활 침해, 차별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감염자의 지나친 신상정보 공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발언과 비난,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적 배제와 차단 등이 바이러스 확산의 차단이란 명분 아래 쉽게 용인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차별적인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다. 바이러스 차단과 인권 보장 사이의 건강한 균형 잡기는 신중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상화하면서 마지막으로 돌봄의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임노동의 많은 부분이 멈추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쉼 없이 제공되는 돌봄노동 덕분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돌봄노동은 아예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거나 저평가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악성 바이러스들과의 공존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돌봄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기자명 문경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조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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