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3월5일 서울 신도림역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이동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너무 유약해서 감염병에 취약할까? 재난 상황에서는 단호하고 강력한 권위주의가 더 나은 체제일까? 중국 공산당은 확실히 그렇게 주장하려는 것 같다.

1월2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제도를 충분히 발휘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은 우한 봉쇄와 감시용 드론 등 민주주의 체제가 꺼내들기 어려운 무기로 코로나19와 맞섰다. 베이징이 보기에 이번 방역전은 체제 경쟁이다. 그리고 중국 권위주의 시스템이 개방적 민주국가보다 우월하다고 입증됐다. 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인 2월26일, 관영지인 〈인민일보〉 논평은 베이징의 관점을 압축해 보여준다. “코로나19는 위기이면서 국가 거버넌스 시스템과 능력에 대한 시험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제도가 시대에 호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보장이며, 세계적인 방역 전쟁에도 귀중한 노하우다.” 이제 세계는 권위주의 중국의 선도를 따라야 한다.

서방 언론은 베이징의 승리 선언에 맞설 반례를 원했다. 코로나19 방역전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고수해야 하며, 화끈한 권위주의에 비하면 좀 못 미더운 그 무기로도 성과를 내야 한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나라가 하나 있다. 한국이다. 한국은 코로나19 영향권 한복판에 있고, 대구에서 집단감염이 터진 후에도 도시 봉쇄 옵션을 제쳐뒀고, 세계 최고의 진단 역량으로 확산세를 따라잡는 중이다.

2월25일자 〈뉴욕타임스〉는 대구 르포를 썼다. 제목이 이렇다. ‘코로나19 위기에 맞서 한국의 도시가 개방성을 시험하다. 중국과 반대다.’ 기사는 이렇게 쓴다. “바이러스가 시민적 자유를 시험하는 시대에, 도시를 계속 열어두면서 감염을 공격적으로 감시하는 이 전략이 먹히기만 한다면 민주사회에 본보기가 될 수 있다.” 3월11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칼럼니스트 조 로진이 올린 논평은 ‘민주주의가 코로나19에 맞설 수 있다는 걸 한국이 보여줬다’라는 제목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은 권위주의에 맞서서 개방적 민주국가 블록을 대표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3월11일 대구시 계산오거리 일대 도로의 한산한 모습.

재난은 체제의 역량과 약점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다. 권위주의의 무기는 선택과 집중이다. 권위주의 체제는 단기간에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다. 우한 봉쇄는 그중에서도 상징적인데, 선택과 집중 대상에 못 들면 인권이나 재산권과 같은 기본권도 후순위로 미루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는 이런 총동원이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이 베이징의 논리다. 일종의 지적 도발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권위주의 체제가 재난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해왔다. 베이징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이 합의를 뒤집으려 한다.

왜 지식인들은 권위주의 체제가 더 취약하다고 보았을까. 재난 대응은 자원을 총동원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정보의 문제다. 아마르티아 센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 경제학자이자, 경제학을 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사상가다. 센은 “민주국가에는 기근이 없다”라는 유명한 테제를 제시했다. 기근은 공공자원을 적시에 투입하기만 하면 막기가 꽤 쉬운 재난이다. 가난한 국가라도 얼추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는 종종 기근 대응에 실패한다. 국지적으로 식량이 부족할 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현장 정치가와 행정가가 재빨리 반응한다. 거기에 그들의 자리가 달려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는 최고 지도자의 의중이 가장 중요한 정보다. 위에서 생산된 정보가 아래로는 내려가지만, 아래에서 위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권위주의 체제는 국지적 식량 부족을 못 알아채거나 알고도 방치해서 일을 키운다. 기근은 그렇게 닥친다.

‘재난과 싸우려면 민주주의가 더 낫다’

재난 대응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물자가 아니라 정보다. 권위주의는 구조적으로 정보 생산에 취약하다. 이 원리를 가장 비싸게 깨달은 사람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대약진운동의 결과로 무려 3000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후인 1962년, 마오쩌둥은 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리원량은 우한의 안과 의사다. 2019년 12월30일 그는 자기가 본 환자들 중 몇 명이 사스(코로나19의 사촌 격이다) 양성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의대 동급생들이 있는 채팅방에 올렸다. 이 사실이 채팅방 밖으로 퍼져 나갔다. 1월3일 리원량은 우한의 공안국에 불려가 경고를 받았다. “인터넷에 부정적 발언을 올렸다”라는 이유였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는 자술서를 썼다.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를 보던 리원량은 1월8일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1월12일부터는 집중치료실에 격리되었다. 진단키트가 없던 때라 확진은 2월1일에야 받을 수 있었다. 리원량은 2월7일 사망했다. 그는 감염병 유행 초기 중국 공산당의 정보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리원량의 비극은 마치 아마르티아 센의 책에서 직접 튀어나온 사례처럼 보인다. 그는 현장에 있었고, 필요한 전문성을 갖췄으며, 그래서 중요한 무언가를 포착할 수 있었다. 우한 공안국은 재난에 반응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자기 담당 구역이 안정되고 문제가 없어 보이는 데 관심이 있었다. 권위주의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기로 이보다 적나라한 사례도 흔치 않다. 1857년 창간한 유서 깊은 미국 잡지 〈디애틀랜틱〉은 2월24일자로 ‘감염과 싸우려면 민주주의가 더 낫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서방 언론이 방역전을 체제 경쟁으로 읽는 또 다른 사례다. 기사는 리원량 사례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중국이 바이러스를 은폐한 것은 시스템 오작동이 아니다. 권위주의 체제는 그런 은폐가 시스템 작동 원리다.” 결국 감염병 초기 대응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칼럼니스트 조 로진은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중국은 초기 몇 달 동안 부정과 은폐로 대응하였는데, 이것이 바이러스가 세계로 퍼져 나간 중요한 이유였다”라고 지적했다.

ⓒEPA2월7일 우한중심병원 주변에 마련된 리원량 의사의 추모소에 그의 사진과 꽃다발이 놓여 있다.

특히 전파력이 강한 코로나19는 발생 국가의 정보 생산역량이 모든 지구인에게 중요하다. 권위주의 체제는 그 특유의 ‘정보 생산 무능’(권위주의는 권력이 인민을 감시하는 정보 생산에는 탁월하지만, 재난 상황에서 절실한 정보는 그 반대 방향이다)을 드러냈다. 최초 발생 국가가 하필 권위주의 체제였다는 우연이 세계에 떠넘긴 부담은 계산조차 쉽지 않다. 아마르티아 센의 테제는 마오쩌둥부터 시진핑까지 권위주의 체제의 약점을 일관되게 설명한다. 2020년의 베이징은 센의 숙제를 풀어낸 게 아니라, 그냥 못 본 척했다.

그 반대편에 한국 모델이 있다(보통은 미국이 서던 자리인데, 영어권 언론들이 트럼프 행정부에 그 역할을 기대하는 기색은 별로 없다). 정보는 한국 모델의 핵심 무기다. 정보의 투명성과 생산성 양쪽에서 한국 모델은 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다. 감염자 정보는 구체적인 동선까지 공개된다. 인권침해 소지가 없지 않으나, 덕분에 재난 상황에서 종종 등장하는 집단 패닉의 기색은 없다. 외신은 긴장감이 높지만 차분한 대구의 분위기를 놀라워하며 보도한다.

정보의 생산성도 매우 높다. 한국의 코로나19 진단 능력은 3월11일 미국 하원의 코로나19 청문회에서도 비교 대상으로 거론됐다. 캐럴린 멀로니 하원의원은 “한국은 하루에 1만5000명을 검사할 수 있다. 미국의 두 달 치보다 더 많은 수를 하루에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뒤처진 것인가?”라고 질의했다. 라자 크리슈나무티 하원의원도 “인구 100만명당 한국은 4000명을 검사했다. 미국은 15명이다. 미국은 언제쯤 그 수준에 도달하나?”라고 물었다.

개방을 유지하고, 그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되, 탁월한 정보 역량으로 위험을 최대한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따라잡는다. 이 모델이 권위주의 모델보다 더 잘 작동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최대한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따라잡기’가 언제까지 가능할지도 불확실하다. 그래도 이 모델은, 권위주의 모델의 본질적 약점인 정보 생산을 최대 무기로 내세우는 제대로 된 라이벌이다.

이쯤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선언해도 될까? 한참 이르다. 감염병 재난 앞에서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는 전혀 다른 숙제를 만나는데, 까다롭기로는 뒤지지 않는다.

이재열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재난사회학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다. 그는 ‘사회의 질’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사회의 질이 높으면, 재난을 만나도 회복력(Resilience)이 높다. 같은 재난을 만나도 사회마다 회복력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사회의 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의 질이란 게 뭘까?

“사회의 질은 두 축의 긴장과 균형이 유지될 때 높아진다. 첫째, 사람들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집단적 과제를 풀어내게 집합행동을 해내야 한다. 전자로 너무 가면 사회가 해체되고 후자로 너무 가면 전체주의다. 둘째, 제도와 시스템은 유능하고 규칙성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상황 변화에 적응하도록 유연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전자로 너무 가면 국가주의고 후자로 너무 가면 무능해진다. 개인과 제도 두 차원 모두 긴장과 균형이 잘 유지될수록 사회의 질이 높다.”

이런 얘기다. 중국 모델은 개인 차원에서 집합행동에 탁월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부족하다. 시스템의 규칙성은 매우 높으나 유연성과 개방성은 낮다. 중국은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딜레마의 한쪽을 아예 포기하고 반대쪽 극단으로 내달리는 체제다. 이러면 문제 해결 능력이 높아 보인다. 민주주의 체제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상충하는 현실을 다뤄야 한다. 딜레마는 민주정의 숙명이다.

재난 상황에서 느끼는 공동체적 일체감

한국은 훌륭한 사례 하나를 만들어냈다. 드라이브 스루(차량에 탑승한 채로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시설) 선별진료소다.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는 방역 작업이 간소해 시간을 절약하고, 접촉을 최소화하므로 감염 예방 효과도 크다. 캐럴린 멀로니 하원의원은 청문회에서 “한국에 가서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에서 검사받고 싶다. 우리는 왜 이런 게 없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방정부가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를 도입한 건 2월26일이다. 민간이 좀 더 빨랐는데, 칠곡경북대병원이 2월23일에 최초로 이 모델을 내놓았다. 인천의료원 김진용 감염내과 과장 등이 범학계 대책위원회에서 내놓은 아이디어를 칠곡경북대병원 감염내과 교수가 듣고, 이를 병원에 도입했다.

현장 전문가의 아이디어가 민간의 자유로운 실험으로 이어지고, 이게 성공하자 다시 정부가 받아서 제도화한다. 재난 국면에서 열린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해 보여준다. 민간의 창의성과 관료적 역량은 이런 식으로 시너지를 낸다. 위기 컨설팅 업체인 미국 유라시아그룹의 이안 브레머 회장은 트위터에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 사진을 올리고 “혁신은 회복력을 끌어올린다”라고 썼다. 그가 재난사회학자였다면 “사회의 질은 회복력을 끌어올린다”라고 썼을지 모른다.

ⓒ시사IN 조남진서울 마곡8구역 공영주차장에 설치된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의 모습.

딜레마는 또 있다. 개인위생 챙기기,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 거리 확보하기, 대중집회 하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쓰기, 감염이 의심되면 스스로 최대한 격리하기 등은 감염병에 맞서는 중요한 행동지침이다. 나 하나가 지킨다고 예방되지 않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함께해야 예방 효과가 있다. 즉, 좋은 집합행동이다. 민주정은 좋은 집합행동을 하도록 시민을 독려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 강제력을 지나치게 동원하면 개인 자유의 본질이 침해될 수 있다. 정부는 교회의 집단 예배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지만 공권력으로 강제하기는 어렵다.

재난 국면에서는 이 딜레마가 특히 문제가 된다. 재난은 사람들이 서로 혐오하도록 만들고, 우선 살고 보자는 마음을 자극하여 각자도생하도록 만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감염원에 노출되고도 거짓말하는 사람이 나오고, 종교행사를 하겠다고 감염병 관리 수칙을 무시하는 종교가 나온다. 사재기도 등장한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놔두면, 각자도생과 외집단 혐오의 스위치가 눌릴 수 있다. 민주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이 딜레마를 다룰 수 있을까?

레베카 솔닛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현실참여형 지식인이다.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그녀는 흥미로운 힌트를 준다. 재난은 사람들을 각자도생하게도 만들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놀랍게도 재난은 사람들이 서로 돕고 보살피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게 오히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태도라고 솔닛은 본다.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대표적인 재난 현장을 취재한 결론이다.

그러니까 재난은, 생존자들에게 공동체적 일체감을 맛보게 해준다. 재난사회학을 개척한 연구자인 찰스 프리츠는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사람이 위험과 상실, 박탈을 함께 겪음으로써 집단적인 연대감이 생기고, 든든한 마음과 서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려는 의지가 샘솟는다. 개인과 집단의 목표는 서로 얽혀 있음도 깨닫는다. 얽힘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했을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다정해지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려 한다.”

재난은 연대와 각자도생을 둘 다 만들어내는 것 같다. 서울 관악구에서는 한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이 100만원이 든 봉투를 기부했다. 그는 코로나19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었을 때 구청과 주민센터에서 보살펴준 것이 고마웠다고 밝혔다. 봉투에는 ‘나는 죽을 사람을 구청과 동사무소에서 살려주심을 너무 고마워서 작은 금액이라도 기부합니다. 너무 고마워요’라는 메모가 들어 있었다. 부산 북구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이순업 할머니는 손바느질로 만든 마스크 20개를 행정복지센터에 기증했다. 고양시에 사는 청소년 남매는 저금통에 모은 40만1000원을 기부했다. 광주의 민물장어양식수협은 대구의 의료인들에게 장어 1억원어치를 써서 도시락을 만들어 보냈다. 광주시는 집단감염으로 병실이 부족해진 대구의 확진자들에게 광주의 병실을 내주는 ‘병실 연대’를 가동했다.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는 잘 작동하는 공동체에 속하고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 소속감은 ‘합리적 개인 모델’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고양된 감정을 맛보게 해준다. 우한 교민들을 실어오는 전세기 탑승을 자원한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볼 때, 집단감염이 터지자 자원해서 대구로 달려간 의료인들을 볼 때 올라오는 뭉클한 감정이 바로 고양된 일체감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재난 국면에서 서로 돕고 이어지고 연대하고자 하는 힘이 우리 안에 이미 들어 있다는 의미다. 그 힘을 잘 끄집어낼 수 있다면, 민주정은 개인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지 않고도 재난에 맞서는 좋은 집합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제 재난 국면에서 민주정의 지도자가 받아드는 숙제가 분명해졌다. 재난은 연대와 각자도생의 갈림길에 우리를 세운다. 민주정의 지도자는 공동체가 각자도생의 악순환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집합행동을 만들어내도록 이끌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사용하는 강압적 힘은 민주정의 지도자에게는 없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재난을 만난 시민들이 서로 돕고자 하는 의지, 연결되고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다. 재난 지도자는 시민의 마음을 다루는 자리다.

ⓒAFP PHOTO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월10일 우한의 훠선산 병원을 방문해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단순한 위로와 얼버무리는 낙관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도시 봉쇄 없이도 차분하게 이동을 자제하는 대구의 품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재난을 맞이한 시민은 어느 정도는 불편함과 괴로움을 견디고 헌신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영국 수상에 취임한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는 달리 드릴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재난 지도자는 헌신과 희생을 요구해야 하는 자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재난 지도자는 그 헌신과 희생이 생존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시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재난에 맞서는 싸움이 어떤 의미인지, 가치를 공유하는 시민이 많을수록 좋은 집합행동이 더 잘 만들어진다. 빅터 프랭클은 심리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단순히 살려는 의지가 강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확고한 이들, 프랭클의 표현으로 ‘의미에의 의지’가 강한 이들이 결국 살아남았다.

재난 지도자냐, 행정 서비스 공급자냐

역사에 남은 위대한 재난 지도자들은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코앞에 닥친 재난을 두고도 그들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헌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재난을 극복하는 일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설득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내전(남북전쟁)기에 대통령직을 수행한 재난 지도자다.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유 속에서 잉태된, 그리고 모든 인간은 천부적으로 평등하다는 명제에 바쳐진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전에 휩싸여 그 나라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시험받고 있습니다.”

링컨은 이 내전을 이겨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내전이 ‘모든 인간의 천부적 평등’이라는 가치와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명예롭게 죽어간 분들을 본받아, 그분들이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더 헌신할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의미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 이 연설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서로 이어지고 싶어 하고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우리 본연의 감정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2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공황 이후 취임한 그는 경제적 재난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보장 원리를 미국에 도입하고 싶었다. 1941년에 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치를 제시했다. 경제적 재난에 맞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회제도에 ‘자유’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당시 벌어지던 2차 세계대전이 자유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이제 가난과의 싸움이 히틀러와의 싸움과 다름없는 숭고한 가치라는 주장에 마음을 열었다. 위대한 재난 지도자는 재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없으면 의미 자체를 재정의해서라도 만들어낸다. 그것이 시민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참여를 이끌어내는 열쇠라는 점을 이들은 깊이 이해한다.

재난 지도자가 임무에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정치학자들과 민주주의 연구자들이 꼽는 최악의 사례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이다. 그는 임기 초반에 9·11 테러라는 초유의 재난을 만났다. 미국 시민들은 이 재난을 극복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부시는 요구했다. “쇼핑을 하라.” 그것은 미국인들이 헌신을 요구받고 참여에서 감정적 고양을 느끼는 민주정의 시민이 아니라, 경기 후퇴를 방지할 소비자라는 선언이었다. 미국 민주주의 연구서인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풀이한다. “정부는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시민들은 경제나 부양하고 방해되지 않게 얌전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재난 국면에서 민주정의 수반은 이중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하나는 재난 지도자의 역할이다. 그는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고, 불편하고 두려운 현실을 공유하고, 희생의 의미와 가치를 심어주고, 감정을 고양시키고, 좋은 집단행동을 이끌어낸다. 또 하나는 행정 서비스 공급자다. 그의 역할은 사실상 정반대다.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삶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호하고, 안정된 상태를 최대한 유지시켜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난 대응에 전력투구할 자세를 의심받는 일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가 재난 지도자와 행정 서비스 공급자라는 상충하는 역할의 균형을 잡고 있느냐다. 지역감염 발발 이후 불안이 증대하자, 문 대통령의 코로나19 관련 메시지는 “마스크”에 집중되고 있다. 이 재난에 헌신할 의미를 부여하는 과업은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면 행정 서비스 공급자의 메시지가 재난 지도자의 메시지를 압도한다. 역설은 여기서 나온다. 지도자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면, 시민은 점차 행정 서비스의 소비자가 된다. “자유를 지키는 전쟁”에 부름받은 미국인과, “쇼핑”을 요청받은 미국인은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마스크를 가장 먼저 챙기면, 시민도 그를 가장 먼저 마스크로 평가한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3월6일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마스크 생산업체를 방문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감염병과의 싸움 그 이상이다. 각자도생의 악순환에 맞서서 헌신과 연대의 가치를 지키는 싸움, 특정 지역에 낙인을 찍고자 하는 욕망에 맞서서 공동체에 함께 속한 고양감을 지키는 싸움, 권위주의 모델에 맞서서 민주주의 모델이 유효하다고 입증하는 싸움이라는 의미가 켜켜이 싸여 있다. 시민들은 이들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의미를 느끼고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숭고한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게 왜 숭고한지 말해주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럴 때 시민들은 동료 시민과 같은 종류의 숭고함을 느낀다고 믿을 수 있고, 더 쉽게 연대한다. 민주정은 그런 감정의 고양 없이는 결국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재난에 맞서는 민주정은 특히 그렇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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