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포스트 모르템 사진(사후 사진)’. 죽은 이는 누구일까? 흔들린 쪽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200년 전 1820~1830년대에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팬데믹은 콜레라였다. 콜레라균에 오염된 물, 음식과 이것을 만진 손까지 감염원이었다. 콜레라는 도시에서도 만연했다. 당시 런던에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오물이 넘쳐났다. 하층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이런 환경은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기에 최적이었다. 당시 런던의 상류층 평균 기대수명은 38세, 노동자의 그것은 17세에 불과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만든 세계적 교통망을 통해 전염병은 급속히 번져갔다. 콜레라는 인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까지 들어왔다. 당시 콜레라로 숨진 동아시아 사람은 1500만명에 달했다. 신대륙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라틴아메리카를 배경으로 한다. 그 시대가 낭만적이라고 이야기할 당대인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포스트 모르템 사진(post-mortem photography)’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있다. 우리말로 ‘사후 사진’으로 번역하면 적절할 듯하다. 사진이 발명된 19세기 초, 초상 사진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귀족이나 가질 수 있었던 초상화에 비해 10분의 1 가격으로 초상 사진을 찍고 가질 수 있었다. 중산층이 이 사진 찍기를 선호했다.

그러다 지금의 영정 사진처럼 죽은 이의 사진을 촬영하고 보관하는 풍습이 생겼다. 특히 이들은 전염병으로 급사한 배우자나 자식의 사진을 찍고 죽은 이들을 기렸다. 전염병은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도 앗아갔다. 남겨진 가족들의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래서 가족이 죽으면 사후 경직이 일어나기 전, 시신을 사진관으로 옮겨 자연스러운 포즈를 만든 뒤 사진을 찍었다. 가족도 함께 찍을 때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연출을 했다. 당시 필름의 감광도가 낮아 노출시간이 몇 분씩 길었는데 꼼짝하지 않도록 하는 보조기구가 사용되기도 했다. 시신은 움직이지 않아 매우 선명하게 찍혔지만 산 사람은 약간의 흔들림이 포착되어 사진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이 가능했다. 이런 사후 사진은 대규모 전염병이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사라졌다.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팬데믹에 새겨진 자본주의의 차별

사후 사진에 등장하는 이들은 당대 최고의 의상을 입고 고인이 아끼던 소품도 함께 배치되었다. 의상과 소품은 그들의 계급을 엿볼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하다. 사진이 초상화에 비해 많이 저렴했지만 당시 노동자들이 찍을 수준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전염병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계층이지만 남아 있는 사진이 매우 희귀하다.

전염병은 인간에게 전파된다. 돈이 많을수록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낮았고, 가난할수록 전염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높았다. 이번 코로나19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학교가 휴교해도 아이들 돌봄에 문제없는 사람들은 감염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매일 출근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코로나19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한 보험회사 콜센터에 근무한 비정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감염되었다. 그들의 취약한 노동환경이 드러났다. 이들의 동선도 공개되었다. 집과 일터만 오간 비정규 노동자들의 동선을 보고 있자니 슬펐다. 예나 지금이나 팬데믹에는 자본주의의 차별이 새겨져 있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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