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3월9일 서울의 한 쪽방촌 주택 빨랫줄에 세탁한 면 마스크가 걸려 있다.

“죄송합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왜 사과했을까. 감염돼서 죄송하고, 출근하지 못해서 죄송하며, 감염당한 이후 자신의 들숨과 날숨에 누군가 감염되어 죄송했다. 정말 죄송해야 하는 게 그들일까. 코로나19가 인류에 의한 재앙이고 결과라면, 확진자나 의심자 상태인 이들은 ‘피해자’다. 그런데 왜 그들이 죄송해야 할까.

우리는 약자들이 죄송한 사회를 살고 있다. 6년 전 ‘송파 세 모녀’가 남긴 마지막 메모도 ‘죄송합니다’로 시작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로 끝났다. 만성질환을 앓는 큰딸과 부상으로 식당일을 그만둔 어머니는 노동할 기회를 얻기 힘들고 노동해도 가난한 사회의 힘겨운 생존자였으며, 터무니없이 엉망인 한국 사회복지제도의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월세를 제 날짜에 못 내서 죄송하고, 아파서 죄송하고, 임노동 시장에 고용되지 못해서 죄송했을 것이다.

불현듯 찾아온 질병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떠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 사람들은 좌절을 느낀다. 노력하면 질병과 빈곤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그들의 좌절감은 실패한 자신의 책임이다. 구조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권력의 속성인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은 자기 경영과 관리의 실패자가 됐다. 실패자로서 세상에 민폐가 된 이들은 존재가 죄송해진다.

코로나19 상황에 비춰보면, 확진자나 자가격리 상태에 있는 이들이 죄책감이나 자책감에 시달린다. 손을 더 자주 씻었으면 괜찮았을까, 그때 거기 왜 갔을까, 비싸더라도 KF 94 마스크를 썼어야 했을까, 그때 재채기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였을까. 버스 말고 택시를 탔으면 안전했을 텐데…. 수없이 자책의 이유를 찾고 자신이 좀 더 조심했더라면 감염되지 않았을 거라며 절망한다.

코로나19 현실에서 확진자의 동선을 포함한 개인정보는 과도하게 상세히 공개되었고,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왜 굳이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느냐, 조심성이 너무 없었던 거 아니냐 정도의 말은 너도나도 쉽게 뱉는다. 그들을 비난하는 기저에는 감염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는 의식이 흐르고 있다. 사실 이런 의식의 흐름은 새로울 게 없다. 우리 사회는 질병의 개인화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질병에 걸리면 다들 한마디씩 한다. 짜게 먹어서, 운동 안 해서, 술 마셔서 암·고혈압·당뇨 등이 왔다며 손쉽게 생활습관을 지적한다.

알다시피 가난하면 질병에 더 많이 걸리고, 질병에 걸리면 가난으로 미끄러진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대표적 이유가 병원비이다.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소득이 결정하고,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더 많이 아프다. 이처럼 우리는 건강 불평등 사회를 살고 있고 건강과 빈곤은 밀접하다. 하지만 건강이 개인의 생활습관과 노력으로 지킬 수 있다는 환상은 질병이 사회적 결과라는 사실을 자꾸 지운다.

이를테면 나는 마스크를 꼭 쓰고 다녀야 한다는 기저질환자에 속하지만 나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했었다. 여러 약국과 인터넷도 틈틈이 들어가 보았지만, 너무 비싸고, 종일 마스크 사기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다. 취약한 몸으로 생계유지 노동도 빠듯한데, 마스크 사는 일까지 감당할 체력도 시간도 없었다. 마스크를 안 써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과 생계 노동을 못해서 빈곤이라는 위험에 더욱 노출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몸이 아픈 빈곤층 상당수가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코로나19라는 불확실한 위험보다 빈곤이라는 확실한 위험이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확진자가 되었다면, 사람들은 부주의하고 게을러서 마스크도 안 쓰고 다녔다고 비난할 것 같다. 효율성도 떨어져서 사회에 짐이 되는 몸인데, 민폐까지 끼친다며 내 아픈 몸을 조롱할 것 같다.

쪽방 주민들의 손 씻기를 보자. 찬물만 나오는 공동 세면장은 손 씻기를 불편하게 하고, 무엇보다 코로나19를 이유로  평소보다 서둘러 폐쇄된 급식소는 위장보다 마음을 더욱 쓰리게 만들었다. 소외감은 자괴감으로 이어지고, 손 씻기와 마스크를 찾아 헤맬 의지가 꺾였을지 모른다. 개인의 잘못된 습관, 부족한 관리 때문에 질병이 왔다? 바로 그 ‘습관’과 ‘관리’가 삶에 녹아 있는 건강 불평등이다. 건강이 개인의 노력으로 지켜질 수 있다는 환상은 건강의 사회성과 연대성을 휘발시키고, 그 빈자리에 ‘질병은 자기관리 실패’라는 낙인을 찍게 만든다. 아픈 몸을 비난하는 문화는 변화할 줄 모른다.

질병의 고통은 사회적 관계에서 온다

코로나19로 촉발된 세계적 인재(人災) 앞에서 인간이 생태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 일부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종들과 지구와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게 근본적 대안이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생태계 파괴로 야생동물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야생동물에게 돌던 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 삼아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몸과 질병을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한다.

최근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코로나19 관련해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조사기관 한국리서치)를 분석해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감염보다 더 두려운 것이 주위의 비난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상황별 두려움’을 묻는 질문에 ‘내가 확진자가 됐을 때 주변으로부터 비난, 추가 피해를 받는 것이 두렵다’라는 항목이 3.52점으로 제일 높았고, ‘무증상 감염되는 것’이 3.17점, ‘주변에 증상이 의심되는데도 자가신고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두렵다’가 3.10점이었다(5점 척도 기준). 질병의 고통은 세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키는 조사 결과다.

현재 코로나19 상황은 아픈 이들을 ‘질병 난민’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면 ‘박해’를 피해 수면 아래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질병을 근거로 차별과 낙인을 하지 않는 것은 윤리의 문제다. 동시에 아픈 이들이 질병으로 인해 차별과 낙인을 겪지 않으리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을 때 사회적 예방이 적극적으로 가능해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바이러스와의 전쟁 자체가 아니라, 우리 일상을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현재는 질병을 둘러싼 차별과 혐오 때문에 사회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인식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정부와 사회는 질병이 생물학적 실체인 동시에 세상의 온갖 편견·환상·감정·이야기가 돌아다니는 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물학적 바이러스 방역만으로는 일상의 안전을 지킬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픈 게 죄송하지 않은 세상이다.

기자명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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