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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세 기사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2014년 권성동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근무시간을 늘리고 휴일수당은 깎는 법안을 냈을 때 쓴 기사다. ‘일주일은 5일’이라는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으로 주 52시간 상한을 넘어 주 68시간 상한제가 이뤄지고 있으며, 이 해석이 대법원에서 무효로 되기 전에 법을 개정하려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굉장히 흥미로웠다. 또 다른 하나는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열차가 연착된다는 소식을 KTX의 선로를 유지·보수하는 코레일 외주업체 노동자들만 듣지 못했고, 그 결과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2명이 사망한 사건을 쓴 기사다. 고용관계의 균열이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현장을 목격했다. 마지막으로 대법원 패소 후에도 싸우는 KTX 해고 승무원들을 들여다본 기사다. 한국 노동법 논쟁의 최전선에 불법파견이 있고 이것이 어떻게 성차별과 맞물려 작동하는지 아프게 확인했다.

황정은 작가는 “내 동거인은 노동이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본다. 노동이 신성한가. 노동은 일단 비싸야 한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전의 나도 ‘취약한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의 연장선에서 노동을 바라봤다. 그 관점에서 노동은 ‘대변해야 할 무엇(혹은 누군가)’이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다른 모든 영역이 그렇듯이, 노동 역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상호작용이다.

스타트업 대관 업무를 하는 누군가가 “노동자라는 말 재고했으면 좋겠다. 젊은 직원들이 노동자라는 말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한다”라고 말한 장면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다. 노동의 신성함이나 당위만으로 설득할 수 없는 영역이 점점 넓어진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노동이라는 ‘블루오션’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일과 이를 둘러싼 조건에 대해 더 많이 떠들어야 한다. 보수의 노동시장 대안을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하고, 주휴수당 무급화처럼 오래된 금기도 언급해야 한다. 이름난 노동 전문기자는 아니지만 ‘꽂힌 분야’를 파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소소한 다짐을 남기고 싶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대사처럼 “해봐야 알겠지만 열심히는 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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