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을 반대한 페미니즘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강의를 마치자 한 청중이 질문했다. 요즘 이와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운동인가? 난민, 게이, 트랜스젠더 등 배제할 존재 목록을 만드는 페미니즘이 과연 페미니즘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결국 페미니즘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페미니즘은 나를 억압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자각하지 못하던 내게 찾아온 질문이고, 대답이고, 렌즈였다. 페미니즘을 통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사실 가부장 체제의 산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차츰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질문하고, 재해석하며, 그 체제가 알려주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페미니즘은 단지 내 인식의 변화, 새로운 경험의 축적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무수한 ‘페미니즘들’을 만나게 했다. 비혼인 내가 기혼 여성이 겪는 복잡한 일상을 이해하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도 페미니즘 덕분이다. 여성을 상품화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구조의 문제를 고민하며 법과 제도를 개선하도록 연대하게 된 것도 페미니즘이라는 연결고리 때문이다. 나를 가장 사랑하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시선으로 억압하는 엄마를 나와 같은 가부장 체제의 피해자인 여성으로서 이해하게 된 것도 페미니즘을 배운 후였다. (심지어) 남성들과 공존할 방법도 궁리하게 되었다.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 벨 훅스의 말처럼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고, 〈페미니즘의 도전〉을 쓴 정희진의 말처럼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그러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연대하는 게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페미니즘이었다.

물론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균열과 한계를 경험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차라리 페미니즘을 몰랐으면 좋았겠다’ 싶은 순간도 많았다. 여성들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고 납작하게 하려는 남성들의 도전에 응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한 순간은 여성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여성을 부정할 때였다. 그들은 자꾸 페미니즘의 그릇을 축소했다. 결혼하는 여성들을 ‘가부장제의 부역자’라며 멸시했고, ‘탈코’ 여부로 진짜 페미니스트와 가짜 페미니스트를 가르기도 했다. 여성 인권을 먼저 챙긴다는 명분 아래 동시대 시민으로 존중받아야 할 다양한 인권은 배제되었다.

페미니즘과 여성 정치의 기본 전제는 무엇?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결국 입학을 포기하게 만든 사람들은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는 사이 누가 여성인가, 그 여성은 누구에 의해,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가, 그것은 당연한가 등 깊고 논쟁적인 질문은 생략되었다. 나를 수용한, 내가 경험한 페미니즘은 더 넓고 유연한 세계이자 늘 변화하며 진화하는 유기체였는데, ‘어떤’ 페미니즘은 그러길 거부했다.

최근 ‘여성 정치’를 표방하며 창당한 정당은 그릇 모양의 로고를 발표했다. “여성의 무한한 가능성과 나은 내일을 향한 열린 터”를 의미한다. 정치 영역에 여성이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는 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그 터에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존재는 배제된다면, 그 그릇이 작아서 다양한 의제를 담아낼 수 없다면 그 정치는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까? 여성 정치는 여성만을 ‘위한’ 정치에 갇히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인 나에게서 출발하여 더 다양한 존재를 만나고, 차이를 이해하고, 함께 부당한 세계를 종식하고자 연대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유기체여야 한다. 여성 정치, 그리고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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