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외교 위해 강경파 밀어냈나
  • 남문희 기자
  • 호수 652
  • 승인 2020.03.1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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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은 핵·미사일 개발 세력과 군수산업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리만건 조직지도부장을 해임했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확실한 담보’를 요구해온 주체파 핵심을 몰아낸 진짜 이유는?
ⓒ평양 조선중앙통신지난해 4월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이 새로 선출된 국무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 두 번째가 리만건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 중 하나인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리만건이 해임되었다. 3월1일, 미국의 대북 전문 방송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의 관영 매체 〈조선중앙통신〉 보도(2월29일자 ‘당 간부 양성기지의 엄중한 부정부패 현상’)를 소개했다. 이 보도의 내용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아래 특별히 소집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리만건 조직지도부장 해임을 발표하면서 부정부패 문제를 제기했다는 정도였다. 이 보도에 RFA가 추가 내용을 보태 해임 배경을 상세히 전했다.

RFA에 따르면, 평양에 있는 김일성고급당학교의 학장과 학교 당위원회 간부들이 재학생들에게 ‘국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1인당 벙어리장갑 100켤레와 달러 현금을 바치라’는 개별 과제를 부과해왔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장사에 뛰어드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것은 호위총국 출신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부관을 지낸 30대 재학생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노동당 중앙위 청사에 근무하는 조직지도부 간부를 만나 당학교 내의 비위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간부는 고발 내용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되는 ‘1호 보고’로 올렸다. 김 위원장이 즉각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이 학교에 대한 집중 검열을 지시해 부정부패 현황을 낱낱이 밝혀내게 됐다고 한다. 검열 결과, ‘김일성고급당학교의 학장과 당위원장이 받는 입학 뇌물 액수가 수천 달러에 이르’며 ‘학과목 교원들은 달러 현금이나 외국산 냉장고, 세탁기 등을 바친 학생들에게 점수를 제대로 줘서 졸업할 수 있게 한다’는 부정부패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평양시 소식통은 RFA와의 통화에서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려면 성분보다 달러 뇌물이 필수라는 사실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 당위원회는 해산됐고 학장 등 당위원회 간부 47명이 출당 철직되어 농촌과 광산에서 ‘혁명화 노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석연치 않은 리만건 해임 이유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는 부정부패 문제와 함께 ‘당 중앙위 일부 간부들의 관료화된 현상과 행세적 행동’을 언급했다. 리만건 부장이 직접적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해임되었다기보다 노동당 내부의 좀 더 복잡한 사정에 엮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해임은 자신의 비리 혐의가 아니라 당 중앙위 간부들의 행태나 당 간부 육성기관인 고급당학교를 관리 감독할 위치에 있는 조직지도부장으로서 포괄적 책임을 졌기 때문일 수 있다.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당의 일개 전문부서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노동당뿐 아니라 내각, 군부까지 포괄하는 간부 인사권 및 감독권, 처벌권까지 한손에 움켜쥐고 있다. 이런 위세를 감안하면 기껏 부정부패를 감독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권력 서열 2위나 마찬가지인 조직지도부장을 해임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통일부 북한 인명 사이트에 따르면 리만건 부장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1945년 1월1일생이다. 그는 2010년 9월 당 중앙위원, 한 달 뒤인 10월 평안북도 당 위원회 책임비서로 올랐다. 이후 조명록 차수와 함께 김정일 위원장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더니 2014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리만건 부장은 2016년 5월, 당 중앙위 군수공업부 부장이 되면서 벼락출세의 길을 걷는다. 같은 해 1월, 북한은 3년의 공백 끝에 4차 핵실험을 감행한 바 있다. 즉, 3년 만의 핵실험을 마친 뒤 핵·미사일 개발 사령탑으로 리만건 부장을 임명한 것이다. 6월에는 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9월 5차 핵실험과 2017년 미사일 정국, 2017년 9월 6차 핵실험 등 미국과 극한대립의 최전선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갈망인 ‘핵무력 완성’을 주도한 최고위 측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급기야 그는 2019년 4월 최룡해의 뒤를 이어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자리에 오른다.

이 정도의 인물이 당 간부 양성학교에서 발생한 부패를 감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을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호위총국 출신 교육생의 고발을 받은 조직지도부 간부는 그 내용을 왜 직속상관인 조직지도부장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았을까? 그 교육생이 김정은 위원장 부관 출신이라는 점도 걸리는 대목이다. 고발 사건의 시점에 김정은 위원장과 리만건 부장의 관계가 튼튼했다면, 보고체계에서 조직지도부장을 소외시킬 수 있었을까. 혹시 두 사람 사이에 큰 갈등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리만건 부장이 북한의 핵무력 개발을 진두지휘한 인물이자 대내외 문제에서 원칙적 성향이 강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12월 대미 협상 전략을 둘러싼 북한 내부의 격렬한 논쟁 과정에서 리만건 부장이 취했을 입장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5일 북·미 스톡홀름 회담이 무산된 뒤에도 외무성은 대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1월 중 미국과 다시 한 번의 실무회담을 통해 연말 이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외무성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외무성의 연말 정상회담 추진 계획은 미국과의 섣부른 비핵화 협상을 경계하는 노동당과 군 내부 ‘주체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이후 국면은 주체파가 주도해왔다.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당 국제부와 외무성 책임자를 교체했고 올 1월1일 전원회의 결정서를 통해서는 사실상 핵보유를 선언했다. 심지어 군 출신인 리선권의 외무상 임명 과정에까지 주체파의 입김이 닿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만건 부장은 노동당 군수공업부를 중심으로 하는 핵·미사일 개발 세력과 군수산업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 핵·미사일을 개발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가 ‘확실한 담보 없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양보할 수 없다’는 주체파의 핵심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김정은 위원장 처지에서 볼 때 리만건 부장은 미국과의 대결 국면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최측근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외교를 해야 하는 국면에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북한 권력 내 주체파들은 무시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리만건 부장을 밀어내려 했다면, 매우 기술적이고 정교한 사전 작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리만건 부장 해임뿐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의 갑작스러운 등장, 코로나19로 떠들썩한 가운데 감행된 단거리 미사일 발사,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청와대 비난 담화 등 북한 권력 내부에서는 기존의 틀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부쩍 자주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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