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코로나19 사태는 예상 가능한 일 중 하나였지만 사회는 그 예상 가능한 일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위는 3월1일 대구 중구 계산오거리 모습.

시처럼 그것은 긴 겨울의 마지막 통로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울은 “공중 한가운데서 타다 만 휴지처럼 떨어지는 한 무더기 죽은 새들”과 같다(기형도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3월1일, 평범한 일요일.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250만 인구의 이 대구에서의 하루를 기록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태의 전말과 그 전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태의 한 순간이 붙들고 있는 우울과 불안과 막연한 공포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구에서의 우리는 지금 우리의 부모 세대와 그 윗세대들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우울과 불안과 막연한 공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작동하는 허구는 아닌가?

집에서도 마스크를 하고 있다. 가족을 보호하거나 나를 보호하려는 것보다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내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한 노인들에게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집 밖 외출을 하지 못하는 대학생인 두 아들은 새벽까지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잠이 들었는지 낮 12시가 되어도 일어날 생각이 없다. 아내는 마스크를 어디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시로 내 여동생과 카카오톡을 주고받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대구·경북의 확진자가 3200명이고 대구에만 2700명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아마 한 주가 더 흘러가면 1만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때마침 아파트 안내방송으로 우리 아파트에도 확진자가 한 명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아내와 나는 불안한 눈길을 나눈다. 아마 집에서 자가격리하고 있을 확진자도 이 방송을 들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는 확진자들을 배제되어야 할 범죄자처럼, ‘좀비’처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1000명이 넘는 ‘문제적’ 확진자들은 왜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공공의료 인프라 부족이 가져온 불행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공공의료 인프라의 부족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내가 참가하고 있는 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여러 보건의료 단체들은 공공의료 확충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동안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10년에는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대구적십자병원이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문을 닫았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구에서 가장 큰 공공병원인 경북대학교 병원은 이제는 마치 민간 병원인 것처럼 굴며 공공병원으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쳤다. 한국의 공공의료 비율은 10% 정도로 OECD 평균인 74%에 턱없이 모자란다. 이것은 준비된 불행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선다. 어제 낮부터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일요일 점심시간인데도 차들은 여전히 빼곡한 그대로이다. 사람들이 집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대구에서도 제법 붐비는 곳 중 하나인 집 주변의 술집과 식당은 토요일 저녁이었던 어제도 3분의 1이 문을 닫았다. 문을 연 나머지 식당들에는 손님이 없거나 있어도 한 테이블 정도였다.

어제 심란한 마음에 상인동 술집 골목에서 깐풍기와 탕수육을 파는 선배에게 배달을 핑계로 전화를 걸었다.

“요즘 배달만 하신다던데 많이 힘드시죠?”

“매출이 평소의 10%도 안 되네. 근처 술집이 100여 군데 되는데 70~80%가 문을 닫았고 문 연 곳은 배달하는 치킨집 정도? 우리야 조그만 매장이지만 100평 가까이 되는 식당은 하루 고정비용이 80만원 이상 될 텐데, 문 열면 손해지. 벌써 열흘이 넘었네. 주인도 주인이지만 종업원들은 대개 차상위 계층인데 어떻게 살아낼는지 몰라. 아르바이트생들도 그렇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이 글을 다듬고 있는 며칠 후인 지금, 선배의 SNS에서 선배 주변 식당 주인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런데 지금은 유채꽃도 피고 있고, 매화도 피고 있고, 동백꽃도 붉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날이다. 이 우울을 어쩔 것인가?

대구가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한 마음에 차를 몰고 시내 중심가로 나가보기로 한다. 조금만 나가면 그 ‘유명한’ 신천지의 다대오 교회가 나온다. 교회 건물 앞 도로를 군부대에서 나온 방역차 몇 대가 소독액을 바닥에 뿌리고 있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 십수 명이 교회 건물을 향해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영화 〈스타워즈〉의 병사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시내 중심가는 조용하다. 주말이면 걷기에도 불편해 한 번도 차를 몰고 들어간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서본다. 거대한 대회전 관람차도 손님 없이 멈춰서 있고,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동성로의 ‘야시 골목’도 텅 비어 있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컴컴하게 문을 닫거나 한두 명의 손님과 우울에 빠져 있다.

잠시 차를 세우고 멍하니 서 있는데 장애인 단체에서 활동 중인 후배로부터 전화가 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며칠 전 장애인 단체 사무실에서 일하던 활동가가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같이 있던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10여 명이 자가격리된 이야기, 장애인 당사자가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어찌해야 하는지 난처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이미 예상 가능한 모든 일 중 하나였지만 사회는 그 예상 가능한 일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만든 이 우울은 실재적인 것일까? 작동하는 허구는 아닐까? 혹은 우울을 작동시키는 허구로서의 정치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아닐까? 사회 전체를 위협하고 영향을 미치는 전염병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전염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는 의학적 문제에 우리가 정신을 파는 사이, 지배자와 ‘갑’들의 정치는 우리 사회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물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구축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공공의료 인프라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았고, 장애인에 대한 고려가 우리 사회에 거의 기입되어 있지 않은 것도 보았고, 사회적 지지의 부재가 어떤 왜곡된 종교로 우리 젊은이들을 망가지게 하는지 보았고, 그 밖에 많은 작동하는 우울과 공포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을’들의 정치다. 전염병은 생물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자연의 느닷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우리의 목소리로 제대로 대답해야 하고, 그 대답이 바로 우리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내 의료인 동료들은 환자들의 병동에서,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며칠 전 나도 그 옷을 입어보고 나서 다시 입기가 두렵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 복장으로 2시간씩이나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을 보면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 윤리적인 마음이 정치적으로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불과 몇 주 전 병원 측의 탄압으로 해고된 한 간호사가 7개월 동안이나 대구 영남대학교 병원 꼭대기에서 한 농성이 현재의 그 수고로움과 겹치면서 저 모든 의료 노동자들의 헌신이 갑과 지배자의 윤리로 미화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노동자의 권리가 찾아져야 한다.

2020년 3월1일 대구의 기록. 우울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는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대구·노태맹 (성주효요양병원 원장·의사·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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