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재 선수가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며 러시아인 코치와 훈련하고 있다.
느낌이 중요하다. 배와 허리에 힘을 줘 척추를 늘여주며 누군가 머리를 위로 잡아당긴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짓말처럼 몸은 가볍게 공중으로 떠오른다. 돌고자 하는 방향으로 팔을 보내면 원심력이 생겨 몸이 돌아간다. 이렇게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돌면 트리플 악셀. 피겨스케이팅에서 가장 어렵다는 기술이 완성된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2009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김연아 선수도 5000번은 더 넘어진 후에야 트리플 악셀에 성공했다고 한다.

3월30일, 미국에서 갈라쇼를 마친 김연아 선수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시각 기자는 태릉선수촌 빙상장을 찾았다.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 두 명이 한창 연습 중이다. 이들도 다음 날이면 비행기를 탄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4대륙 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대회가 코앞이지만 몸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뛰어오를 때 허리에 힘이 덜 들어갔다 싶으면 여지없이 회전수를 채우지 못한 채 엉덩이부터 얼음판에 떨어졌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싶으면 스케이트 날이 미끄러져 몸이 펜스로 내동댕이쳐졌다.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는 딸에게 아프냐고 묻기는커녕 “허리에 힘을 줘야지”라고 질타했다. 그렇게 넘어지고 나서도 김현정 선수(18)는 밝게 말했다.  “연습이 힘들지만 잘될 때는 기분이 좋다.”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현정 선수는 고된 훈련을 하고 있다
김현정 선수는 2009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마음이 바빠졌다. 김나영 선수가 17위를 차지하면서 한국 선수의 전체 성적이 18위가 되어 동계올림픽 피겨 종목 출전권이 2장 생겼기 때문이다. 김연아 선수가 가져가고 남은 한 장을 차지해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김현정 선수의 꿈이다. 김 선수는 “피겨는 점수 게임이다. 내가 내 프로그램을 정확히 연기하면 당연히 높은 점수를 받고 세계 정상도 될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구부러진 다리를 교정하기 위해 여덟 살에 시작한 피겨스케이팅은 김현정 선수에게 세계 최고라는 높은 꿈을 안겨줬다.

김연아 선수가 모델로 나온 현대자동차 광고에는 이런 자막이 깔렸다.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모두 비웃었습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세계는 더 이상 높은 벽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선진국 스포츠라는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 최고 실력을 갖춘 한국인 선수가 나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 수영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 선수를 보고 사람들이 놀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은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계에 주눅 들지 않는 스포츠 신세대

양궁·쇼트트랙 등 ‘틈새시장’을 찾아 올림픽 메달에 도전하던 과거와 다른 스포츠 문화가 나타났다. 선진국이 점령한 ‘레드오션’에서 정면대결을 준비하는 신세대의 등장이다.

김동은군(18)이 처음 카트를 탄 것은 여섯 살 때다. 장난감 자동차같이 생겼지만 시속 160km까지 나가는 카트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대중적인 경주 도구다. 독일 출신인 유명한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도 네 살 때 카트 운전을 시작으로 모터스포츠와 인연을 맺었다. 카레이서이던 아버지 김정기씨 덕에 경기장에서 카트를 처음 탔던 어린이는 어느덧 자라 2008한국모터스포츠어워드에서 올해의 카트드라이버상을 수상했다. 김군은 이제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카트가 아닌 자동차 경주에 도전할 수 있다. 그의 꿈은 세계에 20명뿐인 F1(포물러1) 드라이버가 되는 것이다. 이용기 모노레이싱팀 감독은 “한국은 모터스포츠 역사가 17~18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은 성인이 된 이후에 레이싱 기술을 배운 선수들의 무대였기에 세계 수준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제 외국과 같은 방식으로 어려서부터 기본기를 쌓아온 선수들에게 기대를 걸어볼 때가 왔다”라고 말했다.

 

손연재양(17)은 3월29일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발전 주니어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시니어 부문과 합산해도 3위에 해당하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손양은 얼마 전 말레이시아 에인절컵에서 개인 종합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러시아 등 전통적인 체조 강국 선수들을 모두 제쳐 체조계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센터에서 취미로 시작한 리듬체조가 자신을 유명인으로 만들었지만 손양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올림픽에 나가 목에 메달을 거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이들 선수는 과거에 비해 훨씬 세련된 용모와 매너로 무장한 채 ‘글로벌 시민’으로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김연아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주최 측과의 공식 인터뷰에서 자연스러운 영어로 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홍수환 선수가 1970년대 복싱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며 애처롭게 울부짖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 김현정 선수는 “요즘 피겨 선수들은 해외에 자주 가기 때문에 영어는 기본으로 한다”라고 말했다. 외국 선수와 만나 주눅 든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김진수 선수는 “언어가 다른 나라 선수들하고도 국제 경기에서 만나면 허물없이 장난치며 친하게 지낸다”라고 말했다. 정희준 한국스포츠사회학회 상임이사는 “김연아와 박태환은 한국의 탈근대화가 키워낸 아이들이다. 신체조건부터 서양 선수에 위축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국 신세대가 정상을 차지하는 스포츠 영역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것이 이들에게 당장의 이득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아직 앞서간 사람도 별로 없고, 국가적 기반이 부족한 만큼 많은 시간과 경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스란히 선수 부모가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손연재양의 어머니는 “만약 연재에게 형제가 있었다면 체조를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손양이 일본인 안무가에게 대회에서 연기하는 프로그램을 받아오는 데 드는 비용만 1000만원가량이다. 국가대표전을 준비하면서는 러시아에서 코치를 모셔오느라 선수 5명과 함께 200만~300만원씩을 갹출했다. 방학에는 주로 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드는 항공비와 체류비도 전부 개인 몫이다. 한 대회에 약 500만원이 든다. 외국에 자주 나가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대로 선생님을 불러 영어와 일본어 개인 교습을 받아야 하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에는 체조에 예술성을 더하기 위해 발레와 현대무용도 배운다. 그런가 하면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혹시 진로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 학교 진도에 맞춰 국·영·수 과외도 받아야 한다.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딸의 과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오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후에는 딸의 스케줄에 맞춰 함께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이마저도 어렵다.

김진수군은 자동차 경주의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여덟 살 때부터 카트를 운전했다.

카레이서 아들 키우기 위해 수억원 투자

주유소를 경영하던 김종기씨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직업을 바꿨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 진수군(17)이 카트에 재능을 보이자 직접 잠실에 카트장을 차린 것이다. 집은 레이싱장이 있는 용인으로 이사했다. 김종기씨는 “선수용 카트 한 대가 1500만원 정도 한다. 타이어와 연료 등 소모성 경비가 보통이 아닌 데다 정비사도 여러 명 필요하다. 벌써 수억원이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대중화되지 않은 이들 ‘엘리트 종목’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내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자 하는 선수에게 사실상 계급 장벽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거액인 초기 투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개인은 새 분야에 진입하기조차 어렵다. 나라의 도움도 없는 것이나 같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아무나 ‘제2의 김연아’가 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는 또 있다. ‘진화’한 한국 선수가 세계 스포츠계를 잠식하는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이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는 10년 전에 비해 협찬사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원인을 “박세리 이후 한국 선수들의 잔치가 된 LPGA를 누가 보겠는가?”라는 질문에서 찾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사진에서 축하해주는 외국 선수 모습을 찾기도 어렵다. LPGA가 몇 년 전 시행하려 했던 경기 중 영어 사용 강제 규정은 한국 출신 선수의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굳어졌다.

스포츠사회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백인 선수들이 장악하던 종목에 유색인종이 많이 등장할수록 그 종목의 인기는 하락한다”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정희준 상임이사는 “미국인들은 김연아를 알지도 못한다. 미셸 콴 등 미국 출신 피겨 스타가 사라진 뒤 미국에서 피겨스케이팅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원영신 교수(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는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엘리트 스포츠=백인의 전유물’이라는 기존 스포츠 패러다임을 한국이 앞장서 바꾸고 있다고 본다”라고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원 교수는 또 ‘엘리트 스포츠’ 선호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국내 대중 스포츠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른바 엘리트 종목에서 ‘스타’가 많이 탄생할수록 대중 스포츠 선수의 몸값도 더불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진 시대에 그나마 운동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구실을 할 수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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