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배신해야 목숨을 부지했다
  • 정희상 기자
  • 호수 652
  • 승인 2020.03.2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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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운동권 학생이던 양창욱씨(사진)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에 끌려가 ‘세뇌공작(녹화사업)’을 당하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 양씨는 전두환의 속죄를 요구한다.
ⓒ시사IN 윤무영

1980년 양창욱씨(60)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신입생으로 ‘서울의 봄’을 맞았다. 그 시절 대부분 학생이 그랬듯 양씨도 운동권이 되었다. 1983년 3월7일 4학년이 된 양씨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해 신입생 환영 행사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4학년 김두황, 한선모도 같이 연행되었다.

서울 성북경찰서 형사들은 세 사람을 경찰서 옆 여인숙으로 끌고 가 고문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구속과 강제징집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구속을 각오한 이들은 강제징집을 거부했다. 경찰은 학교에 연락했고 학생처 직원이 군 입대에 동의한다는 사인을 대신 했다. 그해 3월18일 김두황과 양창욱은 강제징집을 당해 춘천에 있는 103보충대로 입대했다. 한선모는 군 입대 면제 대상자여서 강제징집만은 피했다.

양창욱은 이때 아버지를 잃었다. “집에서는 내가 실종된 줄 알았다. 훈련소에서 보낸, 사복이 담긴 소포를 받은 뒤 강제징집된 것을 알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여읜 양씨는 고통스러운 훈련소 생활을 보냈다. 김두황과 양창욱은 신병교육을 마친 뒤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이때 양창욱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준 이가 김두황이었다. 김두황은 고려대 운동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부친상으로 힘들어하는 내게 두황이가 날마다 편지를 보내 ‘창욱아, 외롭고 힘들더라도 여기 군대 역시 우리의 활동공간이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이겨내자’고 위로했다.” 김두황의 위로 덕에 양창욱은 군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는 부대 내에서 솔선수범을 보여 연대장 상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 닥친 운명은 강제징집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른바 ‘녹화사업’이 진행되었다. 녹화사업이란 1982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청와대로 박준병 보안사령관을 불러 회식 자리에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지시한 운동권 학생 세뇌공작을 말한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보안사가 데모 학생들을 데려다가 머릿속 빨간 물을 파란 물로 바꿔라”라고 지시했다. 보안사 주도로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녹화사업이 시작되었다.

김두황과 양창욱도 녹화사업 초기 대상자였다. 이들은 학생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제출하고 휴가를 나가서 학생운동 동료 선후배를 보안사에 밀고하는 ‘프락치 공작’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1983년 6월18일, 양창욱은 김두황이 부대에서 숨졌다는 비보를 접했다. 당시 헌병대는 김두황이 매복 근무 중에 소변을 본다며 매복호 밖으로 나가 밤 11시께 M16 소총을 머리 부위에 4발 잇달아 발사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김두황의 사체는 머리 부위가 총탄에 부서져서 아예 없어지고 몸통만 남았다. 부대에서는 김두황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

양창욱은 이 같은 군의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공포와 불안도 엄습했다. “두황이가 그렇게 죽고 난 뒤 다음은 내 차례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최전방 근무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사단에서 지프차 한 대가 올라와 다짜고짜 나를 싣고 사단 보안대로 끌고 갔다. 보안대로 가니 장교가 기다리고 있더라.”

양창욱은 과천에 있는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열흘 동안 아침에는 가만히 놔두고 밤만 되면 와서 전등불 밑에서 자서전을 쓰라고 했다. 20대 초반 젊은이가 날마다 A4 용지 30~40장 분량의 자서전을 쓸 게 뭐가 있겠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쓰라고 하고, 몇 번씩 쓰고 또 쓰게 하고, 하여간 속에 있는 걸 다 끄집어낼 때까지 두들겨 팼다. 빨간 놈이니까 녹색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태극기 앞에서 보안을 지키겠다는 서명서를 작성하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실을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고 위협한 뒤 서울 충무로에 있는 진양상가의 아파트로 보냈다.”

ⓒ강제징집녹화 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지난해 12월21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회원들이 창립총회 후 전두환씨의 집을 찾아가 시위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6명의 ‘김두황들’

양창욱은 보안사 녹화사업을 받으면서 ‘두황이가 이렇게 죽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상가 내 아파트는 보안사 안가였다.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도록 해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옆방에서 누군가를 때리고 협박하고 고문하는 소리에 늘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양창욱은 이곳에서 프락치 양성 교육을 받았다. 휴가를 빙자해 학교에 들른 뒤 선후배 운동권 학생들을 만나 정보를 염탐해 보고하고, 학생운동 조직 사건을 만들어내는 교육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5일 동안 교육시킨 다음 보안사가 미리 그려둔 조직표를 주고 나더러 휴가 나가서 이름만 맞춰오면 된다고 했다. 표에는 고려대 운동권 선후배들 이름이 다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이 공작을 수행하면 친구를 배신하는 거고, 거부하면 나는 두황이처럼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그는 휴가를 받자마자 학교 대신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몸서리치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밤새 울었다. 할 수 없이 학교로 가서 한 후배를 만나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았다. 후배는 마침 며칠 전 고대 학생들이 성북경찰서에 붙잡혔다며 그 명단을 알려주었다. “‘형 이거 갖다 주면 살 거야’라며 그 자료를 줘서 보안사에 넘겼다. 잘했다고 칭찬하며 3일 포상휴가와 공작금을 더 주더라.”

보안사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이 프락치 활동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는 별도의 ‘전우조’까지 운영했다. “휴가 나가면 전우조 애들을 몰래 붙여서 항상 감시했다. 내가 보안대에 갔다 부대로 돌아오니 두황이가 내게 보낸 편지도 다 없어졌더라. 제대할 때까지 누가 나를 계속 감시한 거다.”

강제징집 녹화사업의 희생자는 김두황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녹화사업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김두황들’이 6명이나 된다. 김두황 외에도 정성희(연세대), 이윤성(성균관대), 한영현(한양대), 최온순(동국대), 한희철(서울대) 등이다.

전두환 정권은 의문사한 녹화사업 피해자들을 대부분 자살로 처리했다. 그러자 김두황이 생전에 가입해 활동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984년 봄 녹화사업 피해자 6명의 명단을 폭로했다. 이렇게 녹화사업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전두환 정권은 1984년 이를 폐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름만 ‘녹화사업’에서 ‘선도공작’으로 바뀌었을 뿐 운동권 출신 학생들을 상대로 한 보안사의 사상교육과 프락치 강요는 노태우 정부 때까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김용권, 최우혁, 박석중 등 3명이 군에서 분신자살하거나 의문사하기도 했다.

1985년 제대 후 양창욱은 녹화사업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다시 민주화운동에 복귀했다. 1987년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6월 민주항쟁으로 석방된 뒤 양창욱은 김두황추모사업회를 꾸렸다. 그때부터 30년 동안 그는 김두황추모사업회 회장으로 살아간다. 녹화사업 피해자로서 양창욱은 평생 동안 친구 김두황의 죽음 앞에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렸다. 억울하게 죽은 친구의 신원은 양창욱의 과업이 되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녹화사업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시도했다. 김두황추모사업회장이던 양창욱은 이때 의문사위를 도와 진실규명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당시 기무사의 비협조와 방해로 진상규명은 무산됐다. 의문사위는 1983년 헌병대 수사 당시 사건 발생 장소가 잘못 적시되는 등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자 의문사위는 김두황 사건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그 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국방부 과거사위)가 설치돼 다시 진상조사를 시도했다. 당시 국방부 과거사위가 파악해낸 전두환 정권 강제징집자는 1152명이고, 녹화공작 대상자는 1192명이었다. 하지만 국방부 과거사위도 기무사 등 관련 기관의 조직적 저항 탓에 자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온전한 진상규명은 미완으로 남았다.

몇 년 전부터 중풍까지 겹쳐 힘들기는 하지만 양창욱씨는 지난해 12월21일 전두환씨 집 앞을 찾아 손팻말을 들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피해자들과 함께 당시 보안사가 각각 부여한 관리번호가 적힌 손팻말이었다.

그동안 강제징집 녹화사업 피해자들이 쉽게 나서지 못한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강제로 군에 끌려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었지만,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동지를 팔아 목숨을 부지했다는 트라우마가 녹화사업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지난해부터 피해자들이 이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녹화사업·선도공작’ 등을 조사한 민간인 조사관들이 피해자 모임을 제안했다. 지난해 3월 피해자 213명이 참여하는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추진위)가 꾸려졌다. 이들은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보안사)에 녹화·선도공작 및 의문사 자료를 공개하고 전두환 등 책임자 사과와 처벌을 요구했다. 또 국회에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양창욱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겪었던 국가폭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데 전율한다. 전두환 세력은 지금도 12·12 쿠데타 성공을 자축하고 있고, 쿠데타 후예들은 지금도 계엄 선포를 꿈꾼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아직 식지 않았고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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