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자라나는 <풀>의 연대
  •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 호수 652
  • 승인 2020.03.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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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풀〉의 일본어판 출판 기념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김금숙 작가는 출판에서 작가와의 만남까지 함께해준 이들에게 ‘TEAM 풀’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로카라 제공〈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한국에서 2017년 출간되었다. 오른쪽은 본문의 위안소 그림.

지난 2월21일에서 2월24일까지 도쿄·오사카·히로시마·후쿠야마에서 그래픽노블 〈풀〉의 일본어판 출판 기념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17년 8월14일 출판되었고, 이어 프랑스어·영어·이탈리아어로 출판되었다. 일본어 번역은 성공회대학교에서 평화와 인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쓰즈키 스미에의 열정으로 성사되었다(〈시사IN〉 제603호 ‘위안부 문제에 평생 바친 어느 일본인 여성의 삶’ 기사 참조). 쓰즈키 스미에의 오랜 벗이자 운동 동지인 이케다 에리코(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WAM의 명예 관장)와 오카하라 미치코(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가 출판위원이 되어 함께 나섰고, 출판은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꽃 할머니〉를 낸 고로카라가 맡았다. 나는 쓰즈키 스미에와 함께 번역을 맡았다.

조금이라도 책의 정가를 낮추기 위해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위안부’ 만화 〈풀〉을 번역 간행하고 싶다!”라는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지난해 9월7일 시작된 1차 펀딩은 4일 만에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했고 2차 펀딩도 순식간에 목표액을 넘겼다. 시민 총 432명이 동참했고 독자 총 280여 명이 작가와 만났다.

김금숙 작가는 이 만남에서 〈풀〉의 제작 동기와 과정, 작가로서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흑과 백의 수묵화로 단순함을 극대화한 그의 그림처럼 절제한 감정이 빚은 간결하고 담담한, 오랜 고민이 묻어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1993년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했고, 프랑스 유학 시절 관련 통역을 했던 그가 ‘위안부’를 테마로 첫 작품을 만든 것은 2013년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고 했다. 어떻게 궁핍한 가정의 자식이자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난 한 인간이 제국주의 전쟁 통에 위안부라는 보급품으로 동원되었는가, 혹시 한국과 일본이라는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그려야 하는가.

〈풀〉은 독자를 가르치려는 작품이 아니다. 간결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은 독자에게 자신을 비춰보게 하고, 붓 터치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바람·비·산·나무·나뭇잎·풀은 이옥선의 마음을 상상해보라고 이끈다. 쓰즈키 스미에와 이옥선 간의 인연도 있었지만, 내가 번역에 동참하게 된 큰 이유는 김금숙 작가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 때문이다. 김 작가는 피해자들이 당했을 성폭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2차 가해라며 잘라 말했다. 이옥선과 함께 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풀〉 속 위안소 방문 앞에는 군화가 놓여 있다. 그 방의 ‘주인’인 여성이 가지런히 놓아뒀을 군화가 있는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자가 상상해야 한다. 거친 붓 터치가 도저히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상상력의 문을 연다. 성폭력에 팽개쳐진 열다섯 살 이옥선이 여섯 칸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 쪽에 걸친 검은 여백 속에 짐승의 울부짖음이 배어 있고 뼈마디 굵은 거친 노인의 손이 그가 평생을 떠밀고 온 고통의 심연을 드러낸다. 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피해자들이 가장 아픈 증언을 할 때 눈을 내리깔고 침묵 속에서 손이나 발을 본다는 걸 안다. 김금숙 작가의 〈풀〉은 고통의 연대를 노래한다.

ⓒ오카하라 미치코 제공2월22일 오사카 다민족공생인권교육센터에서 열린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 행사.

표지 보고 눈물 흘린 이옥선

고통의 연대와 폭력에 대한 상상력은 평화에 대한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풀〉 속에 작가 자신이 등장해서 열다섯 살 이옥선이 걸었을 중국 옌지의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느낀다. 김 작가는 이옥선의 중국 생활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과 차별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꿋꿋이 버텨왔고 지금은 한국에서 평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사는 밝고 유쾌한 이옥선을 그린다. 바람에 스러지고 군홧발에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을 노래한다.

각지에서 책 출판 및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도와준 사람들은 출판위원 3명의 동지들이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 지원 운동을 해온 동지들에게 〈풀〉은 소중한 선물이다. 위안소에서 겪은 피해 사실뿐만 아니라, 이옥선이 살아온 시대 상황과 개인이 겪어낸 역사를 탄탄한 서사로 엮은 〈풀〉은 동지들이 만나온 각국 피해자들의 삶이자 역사다.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함께한 동지들은 이옥선과 조선인 피해자, 중국, 타이완, 필리핀의 피해자를 떠올렸다.

김금숙 작가에게서 완성된 책을 건네받은 아흔의 이옥선은 표지만 보고도 울었다. 한국어판 표지에 그려진 열다섯의 이옥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땋아준 댕기 머리를 하고 있다. 일본어판 표지에는 텅 빈 들판에 이옥선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발아래 저 멀리 산 너머까지 새카만 풀이 바람에 휘둘리고 텅 빈 여백에 풀들이 쓰러져 있다. 그 풀들은 작가가 책을 바치고 싶었던 ‘이옥선들’, 국적과 생사를 불문한 모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일본어판 번역 계획을 처음 들은 김금숙 작가는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었다고 했다. 이제 〈풀〉이 일본에서 출판되고 독자를 만났다. 나흘간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서 김금숙 작가는 풀 한 포기를 나누듯 정성껏 사인한 〈풀〉을 독자에게 건넸다. 어떤 독자는 여성 차별과 민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함박웃음으로, 어떤 10대 독자는 학교에서 못 배운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다며 눈물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김금숙 작가는 책 출판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까지 함께해준 동지들과 독자들에게 ‘TEAM 풀’이라며 고마워했다. 이제 ‘TEAM 풀’은 〈풀〉을 교재로 수업을 하고, 동네 도서관에 〈풀〉 구입 신청을 하며,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나 〈풀〉의 ‘이옥선들’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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