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간 살아남은 ‘가라몽 서체’
  • 위민복 (외교관)
  • 호수 651
  • 승인 2020.03.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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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16세기 프랑스 인쇄업자 클로드 가라몽.

이탈리아에서 출판되는 책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본문 서체 대부분이 가라몽(Garamond) 서체다. 만약 표지를 가리고 본문만으로 책을 본다면 어느 출판사 책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어째서 16세기 프랑스 인쇄업자 클로드 가라몽이 발명한 서체가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책 본문용 서체로 군림하게 됐을까? 물론 이 서체는 원본 그대로의 가라몽 서체는 아니다. 1958년 이탈리아의 식자공 프란체스코 시몬치니가 재작업한 글씨체 ‘시몬치니 가라몬드’이다.

1454년(혹은 1455년) 독일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서양에서 인쇄기를  처음 발명했다. 하지만 후원자 격으로 재정 지원을 해줬던 요한 푸스트와의 소송에서 패배함으로써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더 이상 독점될 수 없었다. 그의 인쇄기와 인쇄술이 곧 전 유럽에 퍼졌다.

움베르토 에코 소설에 등장하는 서체 이름들

클로드 가라몽은 16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서체 조각가였다. 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한 유명 서예가에게 그리스어 알파벳 조판 제작을 지시했는데, 이 그리스어 활자가 워낙 우아하고 아름다워 ‘국왕의 그리스어(Grec du Roi)’라고 불렸다. 가라몽은 이 활자를 라틴어 알파벳으로도 제작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전 유럽에서 그야말로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가라몽 서체는 명조체 계열, 그러니까 글자와 기호를 이루는 획의 일부 끝이 돌출된 형태의 세리프를 갖고 있어서 선이 얇더라도 공간감을 준다. 또한 획이 얇은 만큼 잉크를 절약할 수 있다. 인쇄술 초기에 가라몽 서체의 출현은 상당히 혁신적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지식재산권 개념이 없었다. 즉, 모두가 가라몽 서체를 ‘베꼈다’는 의미다. 16세기경부터 유럽 출판물의 본문 활자는 대부분 가라몽 서체 혹은 그 변형이었다. 책 본문 서체가 대체로 명조체 계열이 된 이유가 바로 가라몽 계열 서체를 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1958년 볼로냐에서 시몬치니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서체 주조소 루트비히 운트 마이어(Ludwig & Mayer)와 협력해서 책 본문용 ‘시몬치니 가라몬드(가라몽)’ 서체를 만들고, 각 출판사들이 이 서체를 선택했다. 다만 활자 조형 기법에 특허를 걸어서인지 그의 서체가 이탈리아 바깥을 벗어나 사용되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는 서체와 관련된 이름이 다수 등장한다. 가령 〈장미의 이름〉을 보자. 여기에는 바스커빌(Baskerville)의 수도사 윌리엄이 등장한다. 바스커빌은 이탈리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본문용으로 가라몽 서체를 사용하지 않는 아델피 출판사가 채택한 서체 이름이기도 하다. 1750년 영국에서 제작됐으니 역사가 제법 오래된 서체다. 〈푸코의 진자〉에서는 주인공 3인방이 일하는 출판사 이름이 가라몬드 출판사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가라몬드 사장이 운영하는 또 하나의 출판사가 나오는데, 그 출판사 이름은 마누치오(Manuzio)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인 알도 마누치오(알두스 마누티우스)는 1501년 기울어진 글자체인 이탤릭 서체의 개발을 의뢰했고, 세미콜론(;)을 발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가라몽 서체는 뜻밖에도 1984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 매킨토시용 기본 서체로 지정하면서 디지털 시대에서도 살아남는다. 물론 현재는 모바일 시대가 됐기에 기본 서체에서 탈락했지만 그 생명력은 정말 끈질기다. 라틴어 속담 중 “Verba volant, scripta manent(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남는다)”라는 말이 있다. 서체야말로 ‘말 그대로’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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