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라는 이름을 잃은 사람들
  • 우지연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 호수 650
  • 승인 2020.03.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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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지 그림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는 택배기사 리키, 요양보호사 아내 애비, 그리고 두 자녀가 나온다. 리키는 ‘고소득 자유사업자’라는 소개를 받고 회사로부터 택배 차를 구입한다. 주 6일 새벽에 출근해 하루 14시간씩 쉬지 않고 일하고, 자동차 할부금과 연료비, 보험료, 본인 잘못 없이 발생한 물품 분실·파손 변상과 자동차 고장은 물론 일하다 다친 것까지도 자비로 부담한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하루라도 빠지려면 대체기사 비용과 벌금을 물고 페널티가 쌓이면 일을 그만둬야 하는 ‘노동’을 한다. 이 영화의 원제가 ‘Sorry, we missed you(고객이 부재중일 때 택배기사가 남기는 문구)’이듯, 감독은 몸이 부서져라 일하지만 고단한 노동으로 파괴되어가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삶과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2018년 12월 산업은행 별관 2층 화장실에서 과로사로 숨진 차 아무개씨. 고인은 하청업체 소속이면서 프리랜서인 일명 ‘반(半)프리 계약’을 맺은 개발자였다. IT 보도방이라 불리는 인력 파견업체를 끼고 심하면 10차까지 이어진다는 다단계 하도급 계약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최소한의 조치로 국가 및 공공기관 소프트웨어 계약의 재하도급을 제한했다. 그러자 업체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근로계약서와 개인사업자용 위임계약서, 두 개의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외주가 아니라 직원이라고 하면서도 사용자로서 책임은 지지 않는 방법이다. 고인과 관련된 산업은행(발주자)과 SK C&C(수주사), 대원씨앤씨(수주사의 하도급 업체) 중 누구도 그 죽음을 책임지지 않았고, 지금도 IT 노동자들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

2019년 11월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일곱 번째 극단적 선택을 한 문중원 기수. 고인은 유서에 ‘부정 경마 강요’ ‘마방 배정 부당 청탁’ 등을 고발하면서 이런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마사회(시행처)-마주(말 주인)-조교사(감독)-기수(선수)-말 관리사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 아래서 각종 부조리한 요구도, 몸을 혹사하는 위험한 경주도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에도, 기수는 명목상 동등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었다. 마사회가 모든 말을 소유하던 단일마주제 시기 조교사, 말 관리사, 기수가 모두 마사회 직원이었으나 1993년 개인 마주제로 전환되면서 직원에 불과했던 조교사가 마주와 위탁계약을 맺고, 말 관리사를 고용하고 기수와 기승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고용불안을 방치했다.

2월4일 14년간 CJB 청주방송에서 근무한 이재학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14년 동안 서면계약서 미작성,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급여, 과중한 업무시간을 버텼지만 자신을 비롯한 프리랜서 PD의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하다 해고당했다. 고인과 장기간 같이 근무한 동료들은 회사의 압박·회유에 기존 진술을 번복하거나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았다. 프리랜서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14년의 노동을 부정당한 이 PD는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의 1심 패소 판결을 받았고, 안타까운 비극이 벌어졌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보장해야

소중한 사람들을 더 이상 놓치지 않으려면 이들의 노동을 들여다보고, 노동자라는 이름을 되찾아주어야 한다. 계약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다단계 착취 구조의 끝에 보호받지 못한 채 삶이 파괴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다시 계약을 바꾸어낼 힘을 주어야 한다. 특수고용 노동자 스스로가 대등한 단체교섭을 통해 자신의 노동을 둘러싼 관계를 통제하고, 자신들에게 맞는 권리보호 방안을 마련하며, 계약의 판과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낼 수 있도록 노동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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