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왼쪽부터 〈기생충〉의 박소담·송강호 배우, 봉준호 감독,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칸에서 아카데미까지, 영화 촬영 기간인 4개월보다 긴 여정이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기생충〉 팀은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레이스’에 올랐다. 작은 도시에서 열리지만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이 많이 찾는 행사다. 이때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월까지 투표권을 가진 8000여 명의 AMPAS 회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영화배급사마다 언론 홍보, 시사회 개최 등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펼친다. 봉준호 감독은 이 시기 인터뷰만 600번, 관객과의 대화는 100회 이상 했다고 밝혔다. 그가 수상 소감마다 “집에 가고 싶다. 강아지가 보고 싶고, 충무김밥 먹고 싶다(칸 영화제 이후)”라거나 “본업인 창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골든글로브 시상식 이후)”라고 호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영화의 첫 아카데미 캠페인은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나 넷플릭스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예산이었다. 우리는 CJ엔터테인먼트(투자배급사), 바른손(제작사), 네온(북미 배급사), 그리고 배우들의 팀워크와 아이디어로 메우는 게릴라전이었다.” 2월19일 ‘아카데미 4관왕’ 이후 국내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이 남긴 후일담이다. 〈기생충〉 팀은 영화 소재로 나오는 산수경석이나 복숭아, 피자 박스를 평론가나 관객에게 나눠주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따라 부르기 쉬운 ‘제시카 징글’ 영상을 만들어 SNS에 퍼트리기도 했다. 모두 북미 현지 배급사인 ‘네온’의 톰 퀸 대표가 고안해낸 아이디어였다. CJ엔터테인먼트(이하 CJ)는 이런 프로모션 과정에 100억원 넘는 금액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한 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수상 소감을 전하자, 투자 배급을 담당한 CJ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기생충〉은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에 이어 CJ가 배급한 봉준호 감독의 네 번째 작품이었다. 봉 감독 필모그래피의 절반 이상을 함께해온 셈이다. 제작 배급을 맡은 CJ가 기획 단계부터 전 세계 상영을 염두에 두고 400억원을 투자한 〈설국열차〉는 미국·영국·프랑스 등 전 세계 167개국에 판매됐다.

외신들은 이 부회장을 두고 ‘한국 영화의 대모(CNN)’ ‘한국 영화산업의 선구자(〈포린폴리시〉)’라고 언급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CJ의 국내 영화산업 투자와 봉 감독과 같은 영화인들의 부상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이 부회장의 지원이 없었다면 〈기생충〉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동생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까지 소환해 감사 인사를 전한 이 부회장의 수상 소감을 두고 ‘빈부 격차’를 이야기하는 영화 〈기생충〉의 완벽한 마무리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국의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CJ그룹에 대한 영화계의 시각도 엇갈린다.

CJ는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메가박스중앙을 포함한 국내 5대 배급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깊은 곳이다. CJ그룹은 1995년 제일제당 시절 스필버그 감독이 설립한 드림웍스에 투자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산업에 뛰어들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은 당시 3억 달러를 투자해 드림웍스 작품의 아시아 지역 배급권을 확보했다. 1995년부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해 1998년 최초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 강변11’을 설립했다. 현재는 168개로 늘어났다. 2000년대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등에 이어 2010년대 〈해운대〉 〈명량〉 같은 국내 블록버스터 영화에 수백억원을 투자 배급해왔다. 지금까지 CJ그룹이 투자 배급한 한국 영화는 300여 편, 문화산업에 투자한 누적 금액은 7조원 이상이다. 최근에는 국내 콘텐츠를 바탕으로 미국·중국·동남아에서 현지어로 된 영화를 제작하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CJ는 다양한 규모의 한국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14년 독립·예술영화 상영관이자 배급사인 CGV아트하우스를 설립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시작으로 중·저예산 영화들에 투자해왔다. 대다수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올해부터 투자 배급 사업을 접기로 했다. 영화계에 표준 근로계약서 사용을 주도한 것도 CJ였다. 2013년 8월 도입 당시 표준 근로계약서를 준수하지 않은 제작사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CJ는 〈기생충〉뿐만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한국 영화를 지원해왔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 대표적이다. 각각 CJ와 CGV아트하우스에서 투자 배급을 맡았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이 같은 사례를 들어 영화산업 내 CJ의 위상을 설명했다. “대중성 짙은 상업영화와 이른바 작가주의 감독들의 작품 모두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건 CJ 정도다. 영화당 100억원 단위 자본을 지원할 수 있는 것도 CJ라서 가능하다.” CJ의 위상은 산업계 불균형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소 영화배급사들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AFP PHOTO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제2의 봉준호’가 나오기 위한 조건

지난해 1000만 관객의 영화 5편 중 〈극한직업〉과 〈기생충〉 등 2편을 CJ가 투자 배급했다(나머지 3편은 디즈니컴퍼니코리아가 배급했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펴낸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은 “시장의 편중 구조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해”였고, “디즈니와 CJ의 양강 체제가 구축된 한 해”였다. 두 배급사의 관객점유율을 합치면 50%에 이른다. 한국 영화만 따지면 CJ의 관객점유율은 44%로 최근 5년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2위인 롯데엔터테인먼트는 13.7%, 3위인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는 11.1%로 1위 CJ와 큰 격차를 보였다.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기생충〉의 성공에 CJ가 조력자로 주목받는 현실에 의문을 품는다. “봉준호 감독이 〈옥자〉에서 보여준 것처럼 꼭 CJ가 아니더라도 그의 창작물에 투자하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을까.” 〈명량〉 〈군함도〉 〈극한직업〉 사례를 통해 매번 지적되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도 언급했다. CJ뿐만 아니라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우려다. “현재 영화산업은 리스크를 줄이는 방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창의력이라는 것은 실패를 감수한 도전에서 나오는 것인데, 안전한 선택에서 성공적인 예술작품이 어떻게 탄생하겠나.”

영화계에선 CJ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제2의 봉준호’가 나오기 위해서는 한국 영화산업 전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2월17일부터 반독과점영화인대책위원회는 ‘포스트 봉준호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대기업의 영화 배급과 상영 겸업을 제한, 스크린 독과점 금지, 독립영화 지원 제도화 등을 골자로 한다. 이들은 “오늘과 같은 환경이었다면 2000년대에 개봉했던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제작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봉준호 감독도 이에 동의한다. 2월19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말했다. “내가 데뷔했을 때는 독립영화가 메인스트림에 침투해 다이내믹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이었다. 현재 영화산업에서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1980~1990년대 붐을 이뤘던 홍콩 영화가 급격히 쇠퇴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우리가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 영화산업계가 모험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