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구장제우씨(위)는 복지국가를 건설하려면 보편증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장제우의 세금수업〉은 ‘절세 비법’이 아니라 ‘증세 꿀팁’을 담은 책이다. 저자 장제우씨는 외환위기 당시 대학을 중퇴하고 사내하청, 도급 등 다양한 형태의 생산직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독립 연구자’로 틈틈이 공부를 이어온 그는 한 사회의 고용구조와 격차, 삶의 질이 세금 및 복지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보편증세(부자만이 아니라 모든 소득자가 자기 형편에 맞게 세금을 내는 제도)’라는 논쟁적 주장을 내놓은 장씨를 2월11일 만났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한가?

불필요한 국가지출을 줄여 복지를 확대하자는 이들이 있다. 사회간접자본(SOC) 건설비용이나 국방비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좋은 방안이지만 이런 수단으로는 충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나라 빚(국채)을 내자는 의견도 있다. 물론 한국은 (국가채무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어서) 나라 빚을 낼 여지가 있는 국가다. 다만 경제위기가 아닌데도 복지정책을 위해 국가부채를 늘리는 건(일본과 남유럽이 대표적)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복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 실패하거나 위기에 처하더라도 추락을 최소화할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증세 수단 중 하나로 간접세(주세·부가가치세 처럼 상품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 세금)를 지목했다. 서민을 힘들게 하는 세금 아닌가?

소비세(간접세의 대표적 형태)에 ‘역진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간접세는 상품의 가격 중 일부로 들어가 있다. 부자든 가난하든 해당 상품을 구입하면 같은 액수의 간접세를 납부하게 된다. 소득에 대비해서 계산해보면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더 높은 간접세율을 부담하는 셈이다). 소비세 인상은 물가 상승도 동반한다. 그러나 소비세 등 간접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서민을 위한 조세행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복지를 위한 세금 확보다. 서민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면 간접세도 올려야 한다.

책에서 ‘간접세 신화’를 비판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잘못된 통계로 유통되었다.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역진적인) 간접세 비중이 너무 높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역진성이 문제되는 간접세는 소비세인데, 한국의 총세금 중 소비세 비중은 26.3%로 OECD 36개국 중 하위권인 27번째를 차지한다. 간접세 논란은 한국이 세금과 복지의 질이나 양뿐 아니라 논의에서도 후진국임을 보여준다.

진보 진영은 법인세부터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법인세 인상론자들조차 ‘법인세만 올려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2018년 기준 한국의 법인세는 총세금에서 15.7%를 차지해 OECD에서 네 번째로 비중이 높다(OECD 평균은 9.5%). GDP 대비 법인세 비중은 4.5%로 OECD 6번째다. 법인세를 올려선 절대 안 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인상할 여력이 크지 않다는 것까진 인정해야 한다.

보수 진영은 법인세 부담으로 기업 경쟁력이 저하된다고 우려한다.

기업 세금이 법인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보험료나 국민연금 보험료 같은 사회보험료도 같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논의가 산으로 간다(국제적으로 비교해보면, 사회보험료를 포함한 한국 기업의 세 부담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기업 세금을 선악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덴마크는 기업이 내는 세금이 적은 대신 노동자들이 두둑한 임금을 받는다. 스웨덴은 임금수준이 덴마크에 비해 높지 않지만 기업의 세금 부담은 가장 크다. 기업 세금이 늘면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게 아니라, 적절한 생활수준을 담보하기 위한 임금과 기업 세금의 균형점이 어디인지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찾을 때다. 반면 한국에선 법인세도 올리고 임금도 올리라고 주장하거나 그 반대다. 균형이나 조화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

그래도 ‘부자증세’가 먼저 아닌가?

자산에 매기는 세금인 부유세의 경우를 보자. 그나마 많이 걷는 스위스도 전체 세금에서 부유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 자릿수에 그친다. 부동산 보유세 역시 올릴 수는 있으나 보유세만으로 복지정책을 펴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남는 것은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인데, 한국에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고소득자는 대체로 ‘내가 아닌 사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웨덴은 자신의 소득이 평균소득보다 조금 더 많으면(약 1.1~1.2배 이상이면), 그 ‘초과분’에 대해 최고 50% 이상의 한계세율을 적용받는다. 한국의 상황을 대입해서 이야기해보자. 한국의 평균소득은 3500만~3600만원이다. 그 1.1~1.2배면 4000만원쯤 된다. 이 경우, 연 5000만원 소득자는 1000만원(5000만원-4000만원. 즉 평균소득의 1.1~1.2배를 초과하는 소득 부분)에 대해서는 최고 50% 이상의 한계세율을 적용받는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보기엔 ‘중산층 서민’인데 그 나라에서는 고소득층인 것이다.

중산층과 서민은 증세 대상이 아니거나 후순위라고 여겨졌다.

초고소득자뿐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 한국은 각종 공제가 지나치게 많아 소득세 실효세율이 낮다. 근로소득세 면세자 비율도 약 40%로 주요국에 비해 크게 높다. 물론 이런 수치로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세금과 복지가 무엇인지 관념부터 제대로 잡아야 한다. 세금은 연대의 수단이다.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 자기 몫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부자증세’는 이상하지 않나? 부자가 아니면 연대할 수 없다는 거니까. 스웨덴은 소득세 면세 기준점이 매우 낮다. 연 300만원 이하다(2018년 기준 연 264만원. 연간 264만원 넘게 번다면 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것). 세금을 사회적 연대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부자증세론은 부자가 아닌 시민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없게 한다.

ⓒ연합뉴스2017년 7월20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한국은 세금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

스웨덴도 1980년대에 조세행정 만족도가 낮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세금을 많이 냈다. 물론 만족도가 개선된 지금도 많이 낸다. ‘이 세금은 복지에만 쓰인다’고 꼬리표를 달아 세금을 거두는 방법(복지목적세)도 생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세금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정공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2017년 7월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해되는 측면이 없진 않다. 대통령은 전부터 부자증세가 먼저라고 주장해왔고, ‘종부세 트라우마’도 있다. 연말정산 파동 때 박근혜 정부 지지율이 주저앉는 장면도 봤다. 그런데 기초연금으로 월 30만원 주는 게 나라다운 나라인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돈을 못 받거나 적은 돈을 받는 이들은 어떤가? 취약계층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게 목표라면 부자증세만으론 안 된다는 자명한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사실은 정권이 날아갈까 봐 보편증세를 꺼내지 못하면서 이를 숨긴 채 ‘부자증세가 필요하다’고 기만하고 있다.

증세는 정치인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총선에서도 증세 공약이 나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쉽지 않다. 일단 논의부터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정치에서 ‘장밋빛 청사진’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에 필요한 복지가 실현될 때 나와 남들의 삶이 몰라보게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정치가 줘야 한다. 이 희망이 충만해야 북유럽 수준의 증세 찬성 여론이 조성될 수 있다. 아직 쌓아놓은 자산이 없으면서 새 사회에 대한 열망이 큰 청년 세대는 증세에 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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