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결혼할 수 있는 관계, 결혼하고 싶은 관계는 우리가 맺는 친밀한 관계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2013년 10월20일 부산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여성이 투신했다. 이 아파트에서 여고 동창과 함께 살던 60대 여성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A씨와 B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40년간 동거 생활을 해왔다. 그 아파트에서만 거의 20년을 살았다. 주로 B씨가 돈을 벌고 A씨가 살림을 했다. 아파트를 비롯해 모든 재산의 명의가 B씨 앞으로 되어 있었다. 이제 60대 초반, 100세 시대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요즘 시대에 상속이나 재산 분할은 아직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둘의 동거 생활은 B씨가 말기 암 판정을 받으면서 위기에 빠진다.

A씨는 아파트 명의와 사망 보험금 수령인을 본인으로 바꾸려 했지만, B씨의 조카가 나타났다. 조카는 A씨가 B씨를 간병하는 것도 막았다. A씨는 홧김에 집에 있는 패물과 B씨 통장의 현금을 챙겨 집을 나왔다. B씨의 조카는 A씨를 절도죄로 고소하고 아파트 열쇠를 바꿔버렸다. 세간도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난 A씨는 거리를 전전해야만 했다. B씨의 병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B씨는 진단 후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숨졌다. B씨의 가족들은 A씨에게 B씨의 사망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A씨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뒤늦게 B씨의 죽음을 알게 된 A씨는 함께 살던 아파트에 올라 몸을 던졌다. 여전히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아파트 복도 계단의 창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4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가족을 이루고 누군가를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욕구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살 수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그런 의미로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는 헌법이 정한 행복추구권에 해당한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혼인’은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헌법재판소는 ‘개인의 인격권 및 행복추구권은 개인의 자기운명결정권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성적 자기결정과 특히 혼인의 자유와 혼인에 있어서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89헌마82 등)’라고 명시하고 있다. 혼인의 자유와 선택권은 자신의 삶과 행복을 스스로 선택할 자기운명결정권의 주요한 방식이다. 혼인의 자유와 권리도 자기운명결정권, 행복추구권이라는 더 큰 권리가 실현되는 방식의 하나라면 혼인 외의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장받아야 한다.

원하는 사람과 같이 삶을 꾸릴 자유가 헌법적 권리라면, 그 틀이 꼭 혼인이어야만 할까? 혼인제도는 하나의 선택에 불과해지고 있다. 개인의 가치관, 경제적 상황, 삶의 단계 등에 따라 결혼을 안 하거나 못 할 수 있다. 행복추구권이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자기운명결정권을 포함하고 있는데, 내 운명 중에 혼인만 유독 자신의 의지로 바꾸지 못하는 상수일 수는 없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나 우리 사회의 공익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면 혼인만이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보장하는 길은 아니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특정한 삶의 방식만이 옳은 행복이라고 정부가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혼인하지 않는 사람들도 진심을 다해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 여정을 보장받을 헌법적 권리가 있다.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헌법적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혼인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 그만큼 다양한 행복 여정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결혼할 수 있는 관계, 결혼하고 싶은 관계는 우리가 맺는 친밀한 관계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일단 이성 사이여야 하고, 성적인 끌림이 있어야 하고, 평생 이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동성 커플도, 친구도, 그냥 지금, 어쩌면 몇 년, 살다 보면 평생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관계도 우리 법상 가족으로 등록할 수 없다. 이런 관계는 법적으로 등록하지 못하고, 가족으로서 누리는 권리에서 배제된다.

결혼에 대한 접근은 불평등하다. 이른바 적령기에 별 걱정 없이 결혼을 하고, 서로에게 성실하기만 하면 평생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는 건 한국 사회에서 특권이자 행운이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은 간절히 하고 싶지만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선택이고, 그래서 꿈도 꾸지 않고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돈이 없어서, 법적으로 결혼이 허용되지 않아서 결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을 개인의 취향으로 여기는 태도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결혼 제도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을 가려서는 안 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혼인’만으로 제한하는 건 평등과 차별의 문제다.

가족 다양성 증가는 가족 불안정화

늘어나고 있는 혼인 외 가족들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욕망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혼인의 장벽이 높아지고 혼인에 대한 접근이 불평등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사회복지학자 박승희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확인되는 가족 다양성 증가는 가족 불안정화라고 지적한다. 박승희는 다양한 가족 형태가 늘어나는 게 개인 선택의 기회가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저급할지라도 다양한 일자리를 떠도는 것처럼 불안정한 가족 제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취약한 여러 가족의 형태들을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박승희, 〈가족 다양성론에 대한 성찰적 검토〉).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가족들의 정규직화다. 박승희의 비유대로 가족의 다양화가 취약한 여러 가족 형태를 전전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혼인 밖의 가족들이 불안정한 가족 형태를 반복하며 떠돌지 않도록, 그들도 권리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정규적인 틀을 주는 것이다. 점점 줄어드는 정규직 일자리처럼 우리 사회에서 혼인이란 틀은 점차 좁아져 간다.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노동자들이 계속 다양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것처럼, 이른바 적령기에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이혼, 사별 등으로 결혼 밖으로 튕겨 나온 국민들은 다시 ‘정상 가족’의 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외롭고 불안정한 가족생활을 보낸다.

생활동반자법은 더욱 많은 국민이 가족의 틀 안에서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계획하도록 한다. 내년 휴가는 어디로 갈지 생각하게 하고, 돈을 얼마만큼 모아 몇 년 후에는 전셋집으로 옮길지 판단할 수 있게 하고, 강아지를 입양하게 하고, 노후를 구상하게 한다. 또 같이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해 출산하는 것도 더 고려하게 할 것이다. 삶의 불안함을 버티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쓰는 에너지가 줄어든다면,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좋은 국가는 국민이 원하는 행복을 좇아 살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든다.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서, 집회를 많이 해서, 동성애 때문에, 청년들이 끈기가 없어서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는 정부는 스스로 무능하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기간만큼, 원하는 거리감으로 가족을 꾸려도 안정적인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나가는 게 정말 일 잘하는 국가 아닐까. 고독하고 다양한 국민을 위해 우리 사회와 정치권이 조금 더 힘을 내서 한발 더 나아갈 때가 되었다. 제도는 자유를 위한 것이니까.

〈외롭지 않을 권리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황두영 지음
시사IN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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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두영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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