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일어난 각종 비리를 뜻하는 ‘사법농단(司法壟斷)’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우선 ‘농단’이라는 단어를 나는 일상에서 접하거나,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에 나는 ‘희롱(戱弄)’이나 ‘농락(籠絡)’과 같은 한자를 쓰는 단어일 거라고 짐작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 판사들이 대한민국의 법과 사법 제도를 희롱하거나 농락한 범죄를 뜻하는 단어가 곧 사법농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아 새국어사전〉에 따르면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 의중에 맞추려 한 것이나, 문제가 된다고 여긴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은밀히 관리해온 사실이 과연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한 것에 해당하는지 나는 의문스럽다. 양승태 사법부는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콜텍 정리해고 사건, KTX 승무원 사건, 전교조 교사 고 김형근의 국가보안법 유죄 선고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이석기 전 의원 내란 선동·국가보안법 유죄 선고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 간첩 조작 피해자에 대한 국가 배상책임 불인정 사건,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 반환 사건 등을 스스로 ‘정부 운영에 대한 협력사례’로 열거했고,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 모든 게 사법부가 상고법원 제도와 관련해서만 이익을 얻으려 한 것으로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이 판결들의 함의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에 사법부가 판결을 통해 개입하려 한 것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친정부적 판결을 통해 양승태 사법부가 청와대로부터는 상고법원을 얻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시계를 보수의 방향으로 돌리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즉 양승태와 그에 동조한 판사들이 보수의 가치를 유지하고, 지배계급이 더 오래, 더 많은 이익을 편취할 수 있도록 협조한 것이 사법농단과 재판 거래로 알려진 사건의 본질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사법농단은 “검찰의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에서 사법농단 조사가 이루어지며, 관련 근거 자료들에 검찰의 발표에 따라서, KBS·연합뉴스·조선일보 등 언론에서 제목으로 사용되는 용어”
(위키피디아, ‘양승태 사법농단 의혹’ 항목 참조)다. 즉 이 단어는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팀에서 유래해 언론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 단어의 문제는 사법농단이 사태의 실상을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 외에, 이 단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이 법조인이라는 점에도 있다. 사법농단의 주체가 법조인이라고 할 때, 이 단어는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로 삶이 뒤바뀐 많은 사람들의 존재와 진실을 그 안에 담지 못한다. 검사들이 만들고, 언론이 전파한 언어 안에 양승태 사법부의 판결로 삶이 바뀐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한은 담기지 않았고, 이렇게 엘리트의 언어는 때로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언어에서부터 소외시킨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중에 읽은 〈거래된 정의〉(후마니타스, 2019)는 법관으로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관여한 문제적 재판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다룬 책이어서 소중하고 반가웠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이명선·박상규 두 기자와 박성철 변호사는 판사들이 내린 판결로 인생이 뒤바뀐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 책에서 곡진하게 펼쳐 보인다. 그들은 재판정에 들어오기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판사를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부르며, 법정에서 자기의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를 만들던 노동자였고, KTX에서 승객들에게 객실 서비스를 제공하던 승무원이었고, 수십 년 동안 기타를 만들어온 장인이었고,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혹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을 당한 뒤, 일본 기업으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노동자이거나, 국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고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들이다.

양승태 사법부가 ‘골라낸’ 사람들

이 책의 ‘에필로그’에 박상규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빵빵한 부모님은커녕 든든한 배경이 없어, 이 땅에 믿을 사람이라곤 저 높은 법대 위의 판사들밖에 없어, 순정한 믿음을 바치고 또 바쳤던 사람들. 양승태 사법부는 이런 사람들만 족집게로 골라낸 것처럼 거래했다. 양승태 이전, 모든 시절에 걸친 한국의 사법부 또한 마찬가지다.”

〈거래된 정의〉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박상규·박준영이 공저한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2016)가 있다. 이 책은 ‘재심 3부작’으로 알려진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 무기수 김신혜 사건을 다룬 책이다. 기자와 변호사인 두 저자는 이 책에서 경찰과 검찰의 국가폭력과 법원의 오심으로 살인 누명을 쓴 사람들이 재심을 요청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박상규는 이 세 사건에서 국가기관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이들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제가 탐사보도 2년 동안 하면서 재심 사건 피해자들에게 있는 공통점 세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들은 모두 가난하고, 상대적으로 학력이 짧고, 그리고 모두 자기가 장애인이거나, 아니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들이 살인 누명을 썼던 겁니다.” 그는 “세 사건의 피해자들은 모두 엄마가 없었고 자신들의 아픔을 어디에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라고도 덧붙였다.

양승태 재판 거래의 희생자들 역시 모두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경제적·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급여나 복지 면에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법조 엘리트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양승태 사법부 체제에서 일어난 일들은 법조인이 아니라, 이들 희생자의 시각과 관점에서도 정리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지연된 정의〉와 〈거래된 정의〉를 쓴 박상규 기자는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셜록〉의 공동대표다. 〈셜록〉은 왓슨이라는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데, 나도 월 1만원을 내는 왓슨이다(왓슨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은 neosherlock.com에 가입하면 된다). 왓슨이 되어 〈셜록〉의 활동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시사IN〉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기자명 허진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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