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 창당 40년 무르익는 집권의 꿈
  •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 호수 648
  • 승인 2020.02.1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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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40주년을 맞은 독일 녹색당은 역대 최고 수준의 지지를 얻고 있다. 기후변화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면서 녹색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정 운영 경험도 많이 쌓였다.
ⓒDPA1월10일 창당 40주년 기념식에서 아날레나 샤를로테 베르보크(왼쪽)와 로베르트 하베크(오른쪽) 녹색당 공동대표가 박수를 치고 있다. 가운데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독일 녹색당이 창당 40주년을 맞았다. 1월10일 베를린에서 열린 40주년 기념행사에 1000여 명이 초대되었고, 이 가운데는 독일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도 있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이날 녹색당의 변천을 보여주는 농담을 던졌다. “녹색당을 창당했던 사람들은 40년 뒤 연방 대통령이 창당 기념행사에 초대되어 공식 인사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악몽이었을 테니까.”

급진적인 반정부 모임에서 시작한 녹색당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이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녹색당이 독일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으며, 환경과 지속가능성이 정치적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인정받게 됐다고 평가했다. 녹색당은 현재 지지율 20%대를 유지하며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녹색당 창당은 1980년이지만 뿌리는 68혁명 세대 학생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활발했던 시민운동과 반핵운동의 결합이 창당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환경, 평화, 여성의 권리처럼 기존 정당 시스템에서 다루어지지 않던 주제가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다. 핵과 냉전은 이 시기 대안적인 운동에 공감했던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미국이 서독에 배치하려던 중거리 핵미사일 또한 이런 불안을 키웠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각 지역에서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자발적 시민조직이 만들어졌다. 1979년에는 핵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시민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1980년 1월12~13일, 독일 남서부 도시 카를스루에에서 녹색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1004명이 참석했는데 그 출신이 다양했다. 1968년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반정부 인사, 환경보호 운동가, 반핵 활동가, 평화운동가, 동물보호 운동가,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 보수주의자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틀간 회의 끝에 환경, 사회, 기초 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근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네 가지 가치는 지금까지도 녹색당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83년 선거에서 녹색당은 5.6%를 득표해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녹색당 의원 28명이 탄생했다. 의원 면면에서 당시 녹색당 성격이 잘 드러난다. 평화운동의 상징 페트라 켈리, 과격 시위대 출신 요슈카 피셔, 군 장성 출신이자 평화운동가인 게르트 바스티안, 좌파 테러 단체인 적군파(RAF)의 변호를 맡았던 오토 실리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차림새부터 종전의 의원들과 달랐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수염을 기르기도 했으며, 본회의장에 꽃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다른 의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총리 취임 행사에서 자리를 뜨기도 했다.

1985년 녹색당은 헤센주에서 사회민주당(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한다. 연방정부가 아닌 주정부였지만 처음으로 정부 운영의 한 축을 맡게 된 것이다. 헤센주 환경장관에 임명된 요슈카 피셔는 장관 임명 선서 행사에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운동화 장관’이라 부르기도 했다. 녹색당 내부에서는 연정 참여를 두고 찬반이 논쟁이 치열했다. 연정 참여를 기존 질서에 대한 투항으로 보는 원칙주의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90년 독일 통일은 녹색당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통일 후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녹색당은 구서독 지역에서 의회 진출을 위한 최소 득표율 5%를 얻지 못했다. 반면 구동독 지역에서는 반정부 시민운동가들이 만든 ‘동맹 90’과 녹색당이 ‘동맹 90/녹색당’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해 출마했고, 6.2%를 득표하며 연방의회에서 8석을 차지했다. ‘동맹 90/녹색당’은 지금까지도 녹색당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독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새로 입당한 이들은 과거 서독 녹색당원들보다 현실 정치에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녹색당이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에서 다른 정당과 자유롭게 연정하는 토대가 되었다.

1998년 녹색당은 처음으로 주정부를 넘어 연방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사민당과의 연정이었다. 헤센주에서 연정 경험이 있는 요슈카 피셔가 외무장관 겸 부총리가 되었다. 코소보 사태로 녹색당은 또다시 갈등을 겪는다. 1999년 외무장관인 피셔는 독일이 나토의 일원으로서 코소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승인했다. 독일 참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었다. 녹색당 내 반전 평화주의자들이 반발했다. 1999년 5월13일 코소보 문제 해결을 위한 녹색당의 특별 전당대회가 열렸다. 피셔는 코소보의 상황을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며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되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대량 민족 학살이 반복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라며 군사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피셔는 당원들이 던진 붉은색 페인트를 머리에 맞았다. 독일 녹색당은 나토군의 코소보 개입을 승인했지만 그 여파로 당원을 많이 잃었으며 몇 년 동안 여러 선거에서 패배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독일 사회에 녹색당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사고 직후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선거에서 녹색당은 이전 선거보다 12.5%포인트를 더 얻으며 득표율 24.2%로 제2당이 되었다. 녹색당은 제3당인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했고 당내 대표적 현실주의자인 빈브리트 그레치만이 녹색당 최초로 주 총리가 되었다. 같은 해 라인란트팔츠주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도 녹색당은 이전 선거보다 10.8%포인트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AP Photo1980년 1월 창당대회를 연 독일 녹색당의 초대 지도부 인사들 모습.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민당 제치고 2위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이끌던 독일 연방정부는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탈원전을 결정했지만 녹색당의 공헌은 분명했다. 핵발전소에 대해 수십 년간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던 녹색당이 없었다면 후쿠시마 사고 이후 메르켈 정부를 향해 탈원전을 압박하는 여론이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녹색당은 역대 최고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2018년 이후 치러진 주의회 선거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20.5%를 득표하며 사민당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녹색당의 인기가 치솟는 배경에는 전통적인 정당의 지지율 하락, 특히 사민당의 몰락을 간과할 수 없다. 좀 더 주요한 요인은 녹색당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변화가 독일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면서 ‘프라이데이 포 퓨처(미래를 위한 금요일)’ 같은 기후변화 시위에 젊은 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녹색당에 지지를 보낸다. 당원 수도 급증했다.

과거 세대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녹색당을 지지했다면, 오늘날 녹색당은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정당으로 인식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정에 참여한 경험 또한 녹색당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녹색당 대표를 맡았던 위르겐 트리틴은 시사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녹색당의 성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독일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사민당 연정보다 정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우리가 집권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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