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두 번 죽이는 ‘공정하지 않은 법’
  •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
  • 호수 647
  • 승인 2020.02.1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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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지 그림

“공정해야 할 재판부가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 2003년 1월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남긴 유서 일부이다. 죽음 앞에 선 노동자가 보기에 법은 가진 자에게만 공정했다. 같은 유서에서 고인은 ‘잔액 0원 통장’을 통해 손배·가압류의 실체를 세상에 고발하기도 했다. 그가 삶의 마지막을 보낸 두산중공업이 위치한 창원 성산에서 또 다른 노동자들이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GM은 2002년 수조원대 가치를 지닌 대우자동차를 4000억원에 인수했다. 2018년 군산공장을 폐쇄하며 정부로부터 인수 금액의 두 배에 달하는 자금 8100억원을 지원받았다. 이후 회생의 길을 걷는 줄 알았던 한국GM은 2019년 말,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585명에게 대량해고 통지서를 보냈다.

‘법대로’ 정규직 될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생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2월31일자로 회사로부터 ‘위협’이 담긴 공문을 하나 더 받았다. “전 도급업체 직원 등 외부인들에 의한 생산라인 점거 시 (중략) 발생된 손실분에 대해서 각 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적 책임을 엄중히 물을 예정입니다.” 고지한 대로였다. 1월이 되자 회사는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버린 쓰레기를 ‘땔감’으로 썼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알렸다.

정작 해당 공문을 받은 당사자들은 손배·가압류에 대한 두려움보다 ‘외부인’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왜 우리가 ‘외부인’입니까, 불법파견 인정받고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도 승소하고 있는데.”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수차례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다. 2005년 4월 노동부는 창원공장 6개 업체 843명 전원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 사용자의 형사처벌도 있었다. 2006년 불법파견 검찰 기소 후 7년이 지난 2013년에서야 대법원 판결로 마무리됐는데, 원청인 한국GM 사장(당시 닉 라일리)에게 벌금 700만원을 확정했다.

고작 벌금 700만원이었지만 노동자들은 희망을 가졌다. 결국 ‘법대로’ 정규직 전환이 될 것임을 믿었다. 하지만 회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을 했다. 2013년 노동자 5명으로 시작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은 2016년 대법원에서 전원 승소로 끝났다. 해당 소송에서 ‘전 공정 불법파견’이라는 점이 재차 인정되었음에도 회사는 소송을 낸 5명만 정규직으로 인정했다. 남은 노동자들도 소송을 해야 했다. 2015년 시작된 2차 소송에선 부평과 군산공장 노동자들도 참여했고, 2017년에는 114명이 3차 소송에 들어갔다. 2018년 2월 군산공장이 참여한 2차 소송에서 승소를 알려왔다. 같은 달 한국GM은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했다. ‘정규직이 되어 돌아갈 일터’가 사라진 것이다. 2018년 5월 노동부가 또다시 창원공장 774명 전원에 대해 불법파견을 판정했다. 차일피일 정규직 전환을 미룬 한국GM은 창원공장 585명을 해고했다.

한국GM 비정규직 불법파견 싸움은 그 자체로 법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법원의 판결도, 노동부의 판단도, 벌금도, 강제이행금도, 노동자들을 ‘법대로’ 정규직이 되게 하지 못했다. 한국GM은 585명을 내쫓은 자리에 다시 ‘비정규직’을 뽑는 채용공고를 냈다. ‘배 째라’ 하는 기업의 횡포에 다시 기댈 곳은 법의 판단이지만, 회사 측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처벌은 벌금형에 그친다.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동자 배달호의 동지들이 17년이 지난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는 현실. 배달호가 죽음으로 고발한 ‘손배·가압류’ 남용이 17년 후에도 지속되어 더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행사할 수 없게 덫을 놓는 현실. 수십 년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노동자들은 ‘공정하지 않은 법’의 실체를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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