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의 전당’에 X칠한 입신출세의 달인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47
  • 승인 2020.02.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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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와 10대 국회의장을 거친 백두진은 국무총리도 두 번 지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 대권’을 부여하는 특별법안을 통과시켰고, 유정회 회장을 맡았으며,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등 의회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데 앞장섰다.
ⓒ연합뉴스1972년 5월9일 신민당 의원들이 백두진 국회의장(가운데)을 찾아가 국회의 정상적 운영을 촉구하고 있다.

의전 서열이라는 게 있어. 법적으로 명문화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원수 이하 삼부 요인들과 공무원, 군 고위급,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대상으로 관행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일단 누가 뭐래도 국가 서열 1위는 대통령이다. 그럼 2위는 누구일까? 대통령 유고 시 국가원수를 대행하게 돼 있는 국무총리를 꼽겠지만 행정부 내 권력 승계 순서일 뿐, 대한민국 국가 의전 서열 2위는 국회의장이야.

입법부의 수장이요 ‘민의의 전당’ 국회의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한 분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랫동안 국회의장이 그 정도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게 역사적 사실이야. 국회 로텐더홀에는 단 두 사람,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 서 있어. 이 두 사람은 각각 초대와 2대 국회의장이었지. 그들이 국회의장으로 활약하던 시기로부터 70년 넘게 흘렀지만 그 뒤를 이어 동상을 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폄하가 될까. 역대 국회의장들의 동상은 왜 뒤를 이어 세워지지 못했을까. 의전 서열 2위라는 무게에 걸맞지 않은 인물들이 국회의장 자리를 맡았던 탓도 있겠지. 오늘은 그 이유를 설명할 만한 국회의장 한 명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기로 한다. 제8대와 10대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이라는 사람이야.

백두진은 1908년생이다. 두 살 때 나라가 망했지. 그로부터 나이 마흔을 바라볼 때까지 일본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어. 그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도쿄 상대(오늘날 히토쓰바시 대학)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취직했고 조선은행의 ‘대리’로 해방을 맞게 돼.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고태수라는 인물이 조선은행 군산지점 대리였듯, 대리는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높이 올라갔다 할 만한, 끗발 있는 자리였어. 이 조선은행 대리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그야말로 수직 출세를 했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은행 이사가 되더니 재무부 장관이 됐고 1953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자그마치 ‘국무총리’로 임명된다. 그의 나이 불과 마흔다섯. 김종필 전 총리와 더불어 최연소 국무총리 랭킹 1~2위를 다투는 기록이지.

17년 뒤인 1970년 백두진은 다시 국무총리에 지명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두 번씩이나 경험한 셈이야. 그런데 다음 해인 1971년 그는 ‘국회의장’ 명함을 새롭게 파게 돼. 1971년 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거든. 선수로는 재선 의원이라 했지만 사실상 초선이었다.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됐지만 바로 5·16 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지역구 국회의원 노릇은 한 달도 채우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전직 국무총리에 재선 의원이니 국회의장이 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어. 취임 일성도 근사했지. “8대 국회에서는 변칙 사태가 없을 것이며, 여야의 협조로 의회민주주의를 토착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몇 달도 못 가 빈말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에게 외교, 국방, 경제, 언론 분야의 ‘비상 대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1971년 12월27일 여당 의원들과 일부 무소속 의원의 찬성만으로 국회를 통과하고 말았으니까. ‘의회민주주의’ 대신 ‘의회민주주의 변칙’의 토착화였다고나 할까.

백두진 의장에 대한 야당의 분노는 대단했어. “야당인 신민당은 ‘의장 불신임 결의안’을 발의했고, 백 의장은 스스로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백 의장 사퇴는 야당인 신민당이 불참한 상황에서 여당인 공화당 단독으로 부결했다. 신민당은 이번에는 ‘의장직 사퇴 권고안’을 제출했고, 일부 이탈 표를 염려한 공화당은 의정 사상 첫 백지 투표로 야당의 공세를 막았다(〈시사저널〉 1998년 8월13일).”

국회의장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게 됐지만 박정희 정권은 아직도 배가 고팠고 의회 무시, 민주주의 파괴의 화룡점정을 찍게 된다. 바로 10월 유신이었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해버린다. 그뿐 아니라 야당 의원 20여 명을 중앙정보부로 끌고 가서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 곤죽을 만들어버렸지.

차지철 덕분에 10대 국회의장 되었나

구멍가게의 주인이라도, 유치원 동창회 회장이라도 자신이 대표로 있는 조직이 이렇게 허수아비 취급을 받고 동료들이 고통을 받으면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결기를 세우는 게 보통 사람일 거야. 백두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이 국회를 구성하면서 ‘유신정우회’를 만든다. 유신헌법상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었어. 유신정우회, 줄여서 유정회는 이 ‘임명된’ 국회의원들 모임이었지. 여기에도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였으며, 자신이 수장이던 국회가 하루아침에 문 닫는 걸 지켜봤던 백두진 ‘의원’이 끼어 있었어.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유정회 회장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지금 민족사의 대전기가 될 유신 과업을 추진하여 국력 배양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자(〈중앙일보〉 1973년 4월6일)”고 떠들지 않았겠니.

그러고도 모자라 백두진은 다시 한 번 국회의장을 노린다. 유신정권하의 국회라지만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을 맡는다는 건 될 말이 아니었지. 이 과정에서 며칠 전 본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주인공들이 격돌한다. 유정회 출신이든 뭐든 백두진을 국회의장 시키겠다고 나선 이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에 반대했다. “오래전부터 백 의원이 국회에서 ‘경호실장님 전상서’라는 편지를 써 보내는 심복(김충식,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했겠지.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와 중앙정보부까지 합세한 반대를 뚫고 백두진은 다시 ‘국회의장’이 된다.

이 백두진 국회의장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어. 김영삼 총재가 1979년 〈뉴욕타임스〉와 회견하며 유신정권에 대한 미국의 성찰을 촉구하자 박정희 정권은 그를 국회에서 내쫓아버리기 위해 국회에 김영삼 의원 제명안을 낸다. 자신의 국회의장 등극에 반대한 김영삼 의원에게 포한이 있었던 것일까. 백두진 의장은 이전에 볼 수 없던 ‘과단성’을 과시했어.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저지에 나서자 백두진 의장은 손수 법제사법위원회에 징계동의안을 회부했고, 3분 뒤 소집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단 40초 만에 날치기 통과를 시켜버렸으니까. 물론 그 과단성이 본인의 것이었는지 무소불위의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온 것인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야.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람마다 천 갈래 만 갈래다. 모름지기 ‘입신출세’를 인생 성패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백두진 선생을 연구할 필요가 있을 거야. 인생 망칠 독립운동 따위에 곁눈질함 없이 좋은 머리 활용해서 괜찮은 자리를 꿰차는 기민함, 조선은행 대리가 단 8년 만에 한 나라의 총리가 됐던 시대적 행운, 선출직 국회의원 경력은 거의 없이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 경력만으로 두 번씩이나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담대함, 자신이 대표하는 조직을 허접쓰레기처럼 내다버린 권력의 손아래에 그 머리를 갖다 대고 충성을 맹세하는 비위 등등을 갖추지 않고 어찌 대한민국에서 출세를 논하고 입신을 꿈꿀 수 있단 말이냐. 백두진 의장은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출세를 하려면 나처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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