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리에 모으는 일만으로도 진땀이 난다"
  • 노순동 기자
  • 호수 8
  • 승인 2007.11.0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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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전주에서 2007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이 개막된다. 60개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작가 85명이 내한하는 이번 행사는 유럽의 소개 없이 두 대륙이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시사IN 안희태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전주’ 실무를 지휘하고 있는 시인 김형수씨.
 
 
“어휴. 행사가 커서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이 안 되네요.”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전주’(11월7~14일·조직위원장 백낙청)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11월1일. 이번 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인 시인 김형수씨(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는, 인터뷰 중에도 행사장 준비며 원고 마감 상황을 묻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를 총지휘하고 있는 그에게도 이번 축제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전주’는, 총 60개국에서 내로라하는 작가 85명이 참석하는 대형 국제 행사이다. 준비위원회가 올해 3월 꾸려졌지만, 실제 예산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9월 들어서였다. 김 위원장은 “이러다가 국제 사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조바심이 일 정도였다. 내가 워낙 우는소리를 하니까, 오히려 외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가 내한 작가들의 이름을 듣더니 ‘그들을 한국에 한꺼번에 모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며 위로를 하더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1956년 시작되어 이른바 비동맹 국가들의 문학과 문화를 아우르는 연대 행사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작가회의(AALA)의 명맥을 잇는다. 1980년대 후반에는 평양에서 성대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백낙청 조직위원장에 따르면 과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의 연대는, 동서 냉전의 구도 속에서 다소간 정치 진영 만들기에 흐른 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존재감이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2007년 현재, 한국이 군대를 보낸 이라크에 연락해 작가를 초청하고, 한국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작가들과 행사를 숙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가가 오겠다고 했는데 덜컥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일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작가들이 그런 사례에 속했다. 또 아프리카의 유명 작가인데, 막상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유럽의 소개 없이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만나는 일’은 지난했다. 그 과정에서 거듭 민중에게 문학은 무엇이고,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는 “체제와 국가를 지키는 정치권력들이 중시하는 것과는 다른,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좀더 근본적인 문화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작가들이 한국 문단의 요청에 답을 보내왔다”라고 고마워했다.

현실적인 연대의 필요성도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세계 문학을 유럽이 편집해왔다는 문제 의식에 기반한다. 김형수 공동집행위원장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유럽의 소개로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만난 꼴’이다. 그는 “지구촌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문명을 거느린 두 대륙은 아직 본격적인 소통을 해본 적이 없다. 우리끼리 만나고, 유럽이 끼워달라고 하면 끼워주고, 이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며 웃었다.  

아직도 세계 문학의 편집자는 유럽

유럽이 세계 문학의 편집자였다는 것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국적만 일별해도 쉽게 드러난다. 1920년대에 노벨 문학상이 제정된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영예가 돌아간 것은 1945년이었다. 아시아 문학이 합류한 것은 1968년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수상하면서이고, 아프리카 문학은 1986년 월레 소잉카가 수상하면서이며, 아랍문학은 1988년 이집트의 나깁 마흐푸즈가 수상하면서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학의 내부에는 다른 유형의 거장들이 출현하여 세계 문학의 흐름을 바꾸고, 인류의 미의식에 새로운 영감을 부여해왔다.

이번 행사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간 것은 지난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베트남 작가와 몽골 작가들이 각기 다른 행사로 내한했다. 팔레스타인 몽골·베트남·미얀마의 작가들이 올 기회도 있었다. 2004년 6월에는 그들을 광주 망월 묘역으로 불렀고, 그들은 ‘아시아 작가 평화 선언’을 채택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팔레스타인 작가 한 사람이 말했다고 한다. “한국의 작가 단체처럼 지역 조직까지 살아 움직이는 예가 드물다. 한국 문단이 주동하면 뭔가 되겠다.” 김 위원장은 “그해 내한한 각국 작가들의 반응을 보면서 상상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2006년 창간된 계간 <아시아>도 구심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모국어 범위를 벗어나는 문예지를 발진하며, 국경을 넘어서는 문학 공동체가 가능한지 타진해본 것이다. 이처럼 이번 행사는 그동안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아시아와 다져온 내실 있는 교류가 주춧돌 노릇을 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범위를 아프리카로 넓혔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시인이자 평론가 하리 가루바도 관심을 표해왔다.

그리고 2006년 11월, 구체적으로 동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고은 시인이 전북 도지사를 만난 것이다. “김치나 소리만 팔지 말고 문학으로 뭘 해보자.” 왜 전주이고, 왜 전북인가. 전주는 오랫동안 문향으로서 색채를 간직하고 있고, 현재도 가장 활발한 문학의 생산 기지 구실을 하고 있다. 근대 이후 신재효 이병기 신석정 채만식 서정주 신동엽 최명희 등 작고 문인은 물론, 고은 최일남 오세영 윤흥기 김용택 박범신 양귀자 안도현 은희경 신경숙 남진우 등 한국 문학의 주역을 배출하고 양성한 곳이 전주이다.
"솔직히 어디서 구멍이 날지 모르겠어요. 다들 내로라하는 대가들이어서 모시기가 만만치 않은데." 인터뷰를 마치고도 그는 걱정이 태산이다.

자세한 행사 내용을 알고 싶으면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www.aalf.net). 해외 작가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각종 강좌는 물론, 일반인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이들이 온다
 

   
   
중국/모옌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중편 <붉은 수수>(1986)의 저자로 1980년대 중국 문단에 ‘모옌(莫言) 현상’을 일으켰다. 본명은 관모야.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해 열두 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10년간 농사를 지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면유 가공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1976년 인민해방군 입대 후 비로소 습작을 시작했다.
‘말이 없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1981년 첫 작품 <봄밤의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이후 방대한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백구 그네> <따스함> <천당 마늘종의 노래> <술의 나라> <풍만한 젖가슴 살찐 엉덩이> <행복한 나날들> 등이 대표작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과 <행복한 나날들>의 원작자이자, 제46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태양에 귀가 있다>의 각색을 맡아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 세계는 익숙하다.  

   
   
남아공/루이스 응코시  1936년생. 잡지와 방송에서 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했으며, 아프리카 잠비아 대학과 미국의 와이오밍 대학,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 등에서 문학 교수를 지냈다.
소설 <새의 교미> <지하 인간들> <만델라의 자아> 등을 썼고, <고국과 망명> <이식된 심장;남아공에 관한 에세이> <과업과 겉치레:아프리카 문학의 주제와 문체> 같은 산문집을 펴냈다. <폭력의 리듬> <흑인 정신과 의사>는 희곡 작품. 응코시는 1950~60년대 공산주의 금지법, 출판오락법 등에 의해 작품마다 극심한 규제를 받았다. 1961년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는 것을 계기로 긴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산문집 <치누아 아체베와의 대담>에는 아프리카 소설 문학의 거장인 치누아 아체베, 월레 소잉카와 나눈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팔레스타인/마흐무드 다르위시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1941년 팔레스타인 아카 근방의 마을 바르와에서 태어나,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다. 1948년 이스라엘 군대의 진주로 고향을 떠났다. 1960년 시집 <날개 없는 새>를 펴냈고, 1964년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과 훗날 대표작으로 꼽히는 <올리브 잎새>를 출간했다. 다르위시는 정치적 활동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가택 연금과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아시아ㆍ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주는 로터스 상을 수상했다. 이제까지 시집과 산문집 약 30권을 출판했고, 35개 국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1987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집행위원, 팔레스타인 작가ㆍ언론인 협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1993년 오슬로 회담에 반대하면서 PLO 집행위원을 사임했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그가 고향집으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인 요르단 강 서안의 라말라에 살고 있다.

   
   
르완다/욜란데 무카가사나  1994년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 남편과 형제, 자매 그리고 세 아이를 모두 잃었다. 대량 학살을 회고하고 국가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죽음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 <앎을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의 상처> 등을 썼다. 연극 <94년 르완다>의 공동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 고아가 된 세 조카딸을 입양해 새 가족을 꾸리고 고아 20명을 돌보고 있기도 하다. 국가 재건 원조 및 대량 학살 추모 기금을 창건했다.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교육에 힘쓰는 그의 활동은 국제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1998년 이탈리아 알렉산더 렌거 기금 기념상, 2003년 로마 아치비오 디롤모 협회가 주최한 황금갈매기 평화상, 같은 해 브뤼셀의 21세기 여성상, 유네스코 주최 명예평화교육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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