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사람을 유기농으로 키우는 타이완
  • 타이베이·타이중 이오성 기자
  • 호수 645
  • 승인 2020.02.0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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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선거우 마을은 CSA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유기농 벼농사 등에 종사하는 귀농인들이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타이중에 있는 수허위안에서는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는 대사를 양성한다.
ⓒ시사IN 이오성타이베이에서 1시간 거리인 이란현 선거우 마을. 150여 농가가 다양한 활동으로 마을을 변화시키고 있다.

타이베이 중심가에서 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는 이란현 선거우 마을. 이란현은 타이완에서도 농촌 체험 프로그램으로 이름난 곳이다. 한국인 여행자도 자주 찾는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시멘트로 구획된 반듯반듯한 논이었다. ‘시멘트 이랑’ 주위에는 번듯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타이베이 사람들이 별장으로 쓰는 고급 주택이었다. 우리로 치면 경기도 양평 정도 되는 교외 지역인 셈인데, 논밭이 즐비한 농촌마을이 휴양촌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 마을의 주인공은 도시의 건물주들이 아니다. 유기농 벼농사 등에 종사하는 150여 농가가 마을을 변화시키고 있다. 도시에서 귀농한 이들 농가는 농촌 마을과 도시 소비자를 잇는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공동체 지원 농업)를 실현하고 있다. CSA는 농가와 소비자가 1년 동안 생산할 농산물의 품목과 수량을 결정하여 공급하는 시스템이다. 소비자가 미리 돈을 내면 농가는 유기농 채소와 과일 등을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언뜻 ‘꾸러미’ 사업과 닮았지만, 소비자들이 생산과 유통과정에 여러 형태로 참여하며, 자연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경우 소비자가 그 리스크도 함께 나눈다는 점이 큰 차이다.

대산농촌재단 연수단이 방문한 토요일 오후 마을에서는 철새 탐방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도시인들은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일을 마치고 저녁에 찾아오기도 한다. 타이베이(265만명), 신베이(400만명) 등 대도시와 가까운 이란현은 CSA가 자리 잡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시사IN 이오성구둥 구락부를 이끄는 라이칭쑹 씨.

마을을 변화시킨 주역은 라이칭쑹 씨다. 그는 2004년 이 마을에 ‘구둥(穀東) 구락부’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타이완 최초의 CSA 농장이었다. 400여 명에 이르는 소비자 주주가 구둥 구락부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쌀과 농산물을 먹는다. 라이칭쑹 씨의 명함에는 ‘만다오(慢島, 느린 섬) 생활유한공사 대표’라고 적혀 있다.

선거우 마을은 타이완에서도 CSA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식농 교육(먹거리 교육)을 최초로 실시하면서 사회 교과서에도 실렸다. 리덩후이 전 총통이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 싱가포르, 일본 등 해외에서도 연수를 위해 찾는다.

1970년생인 라이칭쑹 씨는 한국의 학생운동 출신 귀농인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1990년대 일본에서 생활협동조합 일을 배우고 타이베이로 돌아와 소비자협동조합인 타이완 주부연맹 구매 담당자로 일했다.

2000년 이후 그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퇴근에만 매일 2시간이 걸리는 도시에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었다. 그즈음 마침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도시인이 늘어났다. ‘농부가 되고 싶은 도시인에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라이칭쑹 씨는 ‘즐거움’을 강조했다. ‘힘든 도시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왔다면 당연히 즐거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그 결과 마을에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겸한 헌책방과 카페, 식당 등이 만들어졌다. 농한기에는 ‘오키나와 음악의 밤’ 같은 이벤트를 개최하고 농촌방송을 개국해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끔 했다.

라이칭쑹 씨는 선거우 마을의 변화가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타이완 전체로 봤을 때 마을의 생산량은 턱없이 낮지만 타이완 농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라고 말했다. ‘타이완 농업이 못하는 일’은 바로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오게 하는 일이다.

이런 귀농인 가운데에는 이란현 농림국장을 지냈던 양원취안 씨도 있다. 그는 2014년부터 라이칭쑹 씨와 함께 ‘200甲(ha)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선거우 마을을 넘어 인근 마을의 귀농 귀촌자도 함께하는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게 목표다. 이를테면 충남 홍성군 홍동면 같은 귀농 플랫폼인 셈이다.

타이완 중부 도시 타이중에서도 독특한 실험이 이뤄지는 곳이 있다. 수허위안(樹合苑)은 도시에서 먹거리 교육을 하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이곳은 실험공간부터 별나다. 중심가에 자리 잡은 건물은 언뜻 보면 잘 꾸민 플랜테리어(식물 인테리어) 카페 같다. 그런데 내부에 생태화장실이 있다. 용변을 보고 화장실 벽에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톱밥과 섞인다. 톱밥과 섞인 변은 자연발효되어 퇴비로 쓰인다.

ⓒ대산농촌재단천멍카이 씨가 커뮤니티 화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도시와 농촌 연결하는 ‘대사’ 양성

수허위안에서는 요즘 ‘대사(ambas-sador)’ 양성이 한창이다. 대사란 도시에서 직업을 갖고 농민과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농촌 외교관을 말한다. 예컨대 1명의 대사가 유기농 콩 농사를 짓는 10명의 농민과 관계를 맺어 판로를 개척해주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대사는 ‘두부 장인’ 과정을 배워 창업에 나선다. 커피 장인, 된장 장인 등도 가능하다.

농촌 대사가 되는 과정은 5단계다. 1단계는 자기 돈을 내고 농산물을 사는 것. 2단계는 수허위안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깊은 관계를 맺는 것. 3, 4단계는 대사가 되는 과정을 배워 활동하는 것. 마지막 5단계는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다. 2017년부터 대사 양성을 시작했다. 농촌과 도시를 어떻게 이을 것인지 ‘퍼즐’을 맞춘 지 오래되지 않았다. 발효식품 과정을 중심으로 수십 명이 과정을 밟았다.

수허위안을 이끄는 건 천멍카이 씨다. 그는 원래 반도체 회사를 운영하다가 건강이 악화하면서 먹거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엔 유기농 식당을 운영하다 2007년 수허위안이 있는 자리에 파머스 마켓을 열면서 첫발을 뗐다. 그는 연수단에게 ‘도시에서 유기농으로 사람을 키우는 것’에 대해 말했다. “농약을 생각해볼까? 농약은 도시에서 경쟁을 의미한다. 잡초처럼 능력 없는 것들은 다 제거해버린다. 농약을 대체하는 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느리지만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야 한다.”

수허위안에서 쓰이는 ‘커뮤니티 화폐’는 신뢰를 쌓는 수단이다. 자원봉사자 등에게 지급하는 이 화폐로 지역 농민이 생산한 양배추를 사고 커피를 마시고, 먹거리 수업도 들을 수 있다. 서로 관계를 맺은 사람끼리 사용하게 되므로 위조 걱정도 없다. 사람들은 돈으로 신뢰를 산다.

타이완은 한국과 많이 닮았다. 인구의 5%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산지가 많아 농경지가 적다. 농촌인구 고령화가 심각하며, 농산물 수입으로 자국 농업의 위상이 날로 축소하고 있다. 라이칭쑹 씨나 천멍카이 씨의 고민도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어떻게 하면 도시와 농촌을 연결시키고 사람을 키울 것인가. 귀농 플랫폼을 만들고 대사를 양성하는 것은 여러 해법 가운데 하나다.

라이칭쑹 씨와 나눈 대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런 말이었다. “도시인들이 귀농하는 이유는, 과거 농민들이 탈농했던 이유와 같다. 농촌 생활이 힘들어 도시로 갔듯이 이제 도시 생활이 힘들어 농촌으로 오려는 이들이 있다. 농민과 땅은 말을 잘하지 못한다. 사회적 발언권이 없다. 젊은이들이 귀농함으로써 농민과 농촌과 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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