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질기고 깊은 악연
  •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 호수 645
  • 승인 2020.02.0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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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전까지 미국과 이란은 형제국 같았다. 그러나 혁명 이후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로 지낸다.
미국과 이란 사이에 벌어진 ‘결정적 사건들’을 정리했다.
ⓒAP Photo1월6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반미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살된 솔레이마니 총사령관의 그림을 들고 있다.

2020년 새해 하늘에는 전쟁의 구름이 짙게 깔려 있다. 지난해 말 친이란계 민병대의 공격으로 이라크의 미군 주둔지에 근무하던 미국인 한 명이 사망하면서 시작된 암운이다. 이후 놀라움의 연속이다. 미국은 이란 최고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에서 폭살했다. 이란은 미군 주둔지에 미사일 스물두 발을 날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일촉즉발의 위기는 일단 넘겼으나 불안감은 여전히 퍼져 있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조금씩 고조되다가 촉발된 위기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미국과 이란은 가장 가까운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혁명 직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의 마지막 왕 팔레비 에게 “이란은 중동이라는 혼돈의 바다에 떠 있는 유일한 안정의 섬이다”라고 상찬했다. 그만큼 미국은 이란을 믿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미국과 이란은 서로 원수로 지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양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악연의 뿌리를 좇는 이란과 미국의 시선은 서로 다르다.

첫 악연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긴장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아랍 왕정을 강타했던 군부 쿠데타로 이집트·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선 기억 때문이다. 이들 아랍 공화국은 반미·반서구 경향이 강했다. 미국이 구상하는 대소련 봉쇄의 냉전 틀이 흔들렸던 기억이 이란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혁명 이전 미국과 이란 팔레비 왕가의 관계는 돈독했다. 안보 및 경제협력도 견고했다. 이란의 경우, 이슬람을 믿는다지만 세속주의에 가까워 성직자와 일부 신실한 무슬림층을 제외하고는 대개 자유롭고 발랄했다. 테헤란 거리에는 살롱이 즐비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활발했다. 미국 마음에 쏙 드는 나라였다.

‘반이란 정서’의 세 가지 근원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신정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팔레비 왕의 미국 망명 소식을 들은 이란 혁명 세력들은 주이란 미국 대사관 소속 민간인 52명을 444일 동안 억류했다. 40년 악연의 결정적 계기다. 미국 대사관이 공격당하고 미국 시민이 구금되었다. 국가의 세 요소 중 영토와 국민이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인질들은 이듬해 레이건 대통령 당선 후 전원 석방되지만, 사건의 여파는 컸다. 정체불명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자국민들이 억류되었는데도 속수무책이었던 기억이 미국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2007년 샘물교회 자원봉사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44일 동안 피랍되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한국 사회가 겪었던 충격을 생각해보면 미국이 이란을 떠올릴 때 어떤 느낌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Reuter이란 혁명 세력은 주이란 미국 대사관 소속 민간인 52명을 1979년 11월4일부터 444일 동안 억류했다.

두 번째 악연은 레바논에서 이어진다.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해병대 피습 사건의 기억이다. 레바논 내전의 혼돈이 지속되던 1983년 4월19일,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이 차량 폭탄 테러를 당한다. 미국인 17명 등 63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10월23일에는 베이루트 주둔 미국 해병대 기지에서 차량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미군 241명이 숨졌다. 가해 조직이 헤즈볼라로 밝혀지면서 미국의 반이란 정서가 한층 악화된다. 미국은 레바논 시아파 과격 세력인 헤즈볼라를 이란과 시리아의 하수인으로 본다.

반이란 정서의 세 번째 근원은 살만 루슈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출신 소설가 루슈디가 1988년 출판한 〈악마의 시〉는 이슬람권을 격동케 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와 경전 코란을 모독하는 비유를 담았다는 이유였다. 적잖은 이슬람권 국가에서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현상금과 함께 암살 지령까지 하달했다. 호메이니 사후 암살 지령이 풀리고 공식적으로 이란은 루슈디 사면을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란 일부 종교단체는 루슈디를 쫓고 있다. 이 사건은 음험하고 잔인한 이미지의 이란을 부각했다.

이란이 연상시키는 키워드는 인질, 대사관, 미군 공격 그리고 헤즈볼라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국시가 혁명의 수출이다. 단순히 자국 내 정치행위뿐 아니라 이란식의 정치체제를 중동 전역, 나아가 이슬람권으로 확장하겠다는 목표다. 그 대표적 대리 세력이 헤즈볼라다. 그 씨를 뿌리고 관리하고 성장시켜온 주역이 이번에 피살된 솔레이마니가 이끌었던 쿠드스 부대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한 명분은 ‘이란의 합의 위반’이 아니다. 중동 지역 곳곳에 산재하는 친이란 무장세력의 위협과 미사일 개발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52명 인질 사건을 언급하며 이란이 보복 공격에 나설 경우 같은 수의 이란 목표물을 타격하겠노라 천명했다. 1979년과 1983년의 아픈 기억이 2020년 1월에도 여전히 쓰린 통점으로 남아 있다.

이란 처지에서도 할 말이 적지 않다. 더 긴 원한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미국에 배신당한 첫 기억은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이 막 고착되던 1951년 이란에서는 정치적으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입헌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다. 민족주의 정치인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이란 리자 샤 팔레비 왕실과의 합의로 선거를 거쳐 첫 선출직 총리로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란 국민의 열망은 컸다. 왕실도 더 이상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버겁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헌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곧 난항에 빠졌다. 모사데크 총리의 국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이란산 석유로 번 돈이 영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영국은 모사데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1953년 영국과 미국의 해외 정보기관이 움직여 현직 이란 총리 축출 공작을 벌인다. 이른바 ‘아약스 작전’을 통해 모사데크를 실각시키고 왕정을 복원한다. 이란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이중적 태도를 기억하고 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상찬하지만, 자국의 이익이 침해되자 중동의 토머스 제퍼슨이 되었을지 모를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쫓아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AP Photo1953년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아약스 작전’을 통해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위 가운데)를 축출했다.

미국과의 두 번째 악연은 미국의 팔레비 절대왕정 옹호를 계기로 깊어졌다. 모사데크 축출 후 등장한 무함마드 리자 샤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완전한 친서방 세속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1961년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왕실 독재에 대한 비판을 비켜나가면서 반대 진영을 무력화하기 위한 일종의 국가 개조 동원 운동이었다. 백색혁명의 명분이나 슬로건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국가 근대화 운동의 성격도 지녔다. 히잡 착용 및 일부다처제 금지, ‘아시아가 아닌 서양(즉 아리안)’의 정체성 부각, 여성참정권과 교육 기회의 확대 등을 추진했다. 옆 나라 터키의 케말리즘(정교분리, 근대화 등 세속주의 추구)과 많이 닮았다.

팔레비의 백색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왕정의 절대 권한을 유지하고 반대파를 무력화하려는 동기가 앞서 나갔다. 동시에 반정부 그룹을 너무 키웠다. 토지개혁으로 이슬람 모스크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지방 토호들의 재산 기반까지 약화시켰다. 페르시아의 오랜 전통에서 유지되어온 ‘바자르 상권’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슬람 세력과 지방 토호, 바자르 상인들이 연대해 반(反)팔레비 왕정 혁명의 토대로 성장한다. 이란 국민은 왕실의 실정과 독재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믿었다. 그 불만이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토양이 된다.

이란이 미국을 싫어하는 세 번째 이유는 좀 더 독특하다. 이유 없이 이란을 미워한다는 불만이다. 독일과 일본은 숱한 미군 장병들을 살상했음에도 지금 동맹국이다. 베트남 역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잘 지내고 있다. 심지어 핵무기를 만들고 탄도미사일 실험을 서슴지 않는 북한과도 미국은 나름 관계 개선 노력을 한다. 반면 이란은 단 한 번도 미국과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오직 이란만 계속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호메이니가 미국을 사탄으로 규정하면서 타도를 외치긴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이란 지도자들이 반미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같은 이들은 미국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한 지도자다. 2001년 9·11 사태 당시에도, 일설에 따르면 제일 먼저 미국에 위로 전문을 보낸 해외 정상이 하타미 대통령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테헤란에서는 테러를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이란에 가장 깊은 아픔을 남긴 사건이 하나 있다. 1988년 7월3일 미군 함정 빈센트호가 이란 민항기를 오인 격추해 민간인 290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다. 전쟁터도 아니고, 제3국도 아니고, 자국에서 이륙한 민항기를 격추시킨 데 대한 원한과 분노는 오래 남아 있다.

적대감의 수위를 계속 높여오던 양국은 결정적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차원에서 벌어진 2003년 이라크 전쟁이었다. 당시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한 네오콘은 위험국가 셋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이란을 미국의 리더십을 뿌리째 흔들 만한 위험 세력으로 찍었다. 그러나 직접 전쟁을 하기에는 이란이 너무 강했다. 미국은 우회했다. 이란 서쪽 이라크와 동쪽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며 미군 지상군을 대규모로 배치했다. 이미 이란 북부 중앙아시아에는 미군 공군기지들이, 이란 남쪽 페르시아만에는 미군 제5함대 항모전단이 포진해 있었다. 좌우에 세계 최강 지상군이, 위아래로 각각 공군과 해군이 이란을 완전히 둘러쌌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민주화되기만 하면 그 여파가 테헤란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 기대했다. 이란 역시 엄청난 압박을 느끼던 시기다.

그러나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 안정화 작전이 수렁에 빠지면서 미국은 엄청난 반미 공격에 노출되었다. 5000명에 가까운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 안정화 작전에서 무장 세력에게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이 생각했던 민주주의의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거꾸로였다. 테헤란의 영향력이 바그다드와 카불로 파고들었다. 미군 철군 이후 이라크에서는 같은 시아파인 이란과의 협력 기조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번 솔레이마니 사건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제 해당 지역 내에서는 이란의 영향력이 제일 커 보인다. 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 벨트’의 주축일 뿐 아니라, 카타르-오만-예멘을 통해 아라비아반도를 둘러싸는 말발굽 모양의 ‘시아 편자’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이 큰 희생을 감수하고 치른 이라크 전쟁은 이란에게만 좋은 일 시켜준 셈이다.

트럼프 시대에 더 악화한 ‘반미 감정’

부시의 후임자인 오바마는 이전 미국 대통령과 결이 달랐다. 중동과 이슬람권을 깊이 이해하는 편이었다. 이란을 그렇게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또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중동에서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미국이 수렁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중동을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구상은 중동 내의 ‘적대적 균형’ 추구에 가까웠다. 미국은 1979년 이란혁명 이전의 중동 정치 질서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스라엘·이집트·터키가 서로 여러모로 다르고 긴장 관계이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안정적 균형이 이루어졌던 시대다. 미국은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관리하는 역외 균형자 구실을 하려 했다. 이 구상에서 대전제가 이란의 정상화였다. 이란이 적대적일 경우 균형은 요원했다. 미국은 이란을 정상적 행위자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을 천명했다. 핵무기 개발 중단 및 테러리즘과의 연계를 끊어야 한다는 전제였다.

이 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일단 2011년 강도 높은 제재로 이란 경제를 옥죄었다. 경제난이 가중되자 이란 내부에서는 미국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시 대통령 때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달랐다. 이란 내 강경파가 위축되었다. 2013년 중도파인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협상이 급물살을 탄다. 마침내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역사적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즉 이란 핵 합의가 체결된다. 물론 이란의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 완벽한 합의는 아니었다. 문제는 일몰조항이었다. 15년만 합의를 잘 지키면 이란은 합법적으로 농축과 재처리를 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게 되어 있었다. 이란의 적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15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이란이 미국 및 유럽과 교류(자본과 사람)하다 보면 국내에서도 변화가 발생할 것인데, 15년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어차피 적대관계로 계속 가면 전쟁 옵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는 미국이 다시 이란과 전쟁을 결심할 수는 없었다. 이란 핵 합의는 그렇게 체결되었다. 극적이었다. 2015년 연말, 제재가 즉각 해제되었다. CNN 기자가 테헤란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미국 투자자들이 이란을 드나들면서 경제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미 유럽은 이란 곳곳에 제조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재로 인해 수입에 어려움을 겪던 민간 항공기의 대규모 발주 양해각서도 체결되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반발만 잘 무마하면 중동의 안정은 조금씩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이란 국민은 지긋지긋한 제재로부터 벗어나 살 만한 나라가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란의 잠재력인 석유 및 천연가스 부존량은 제조업 기반과 인적자원 측면에서 중동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바마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이란 핵 합의를 비난했다. 비난의 요지는 핵 관련 조항이 아니었다. 이란을 완전히 굴복시켜 위협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중동 지역 내 이란의 영향력을 줄이는 조치가 있어야 했다는 점을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란의 미사일 개발 문제도 지적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했다. 이란 국민의 분노와 좌절은 합의 이전보다 더 거세졌다. 합의를 충실히 이행했는데도 미국은 ‘이란이 원래 불순하고 위협적인 나라’라며 제재를 복원한 것이다. 반미 감정은 한 단계 더 악화되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더 질긴 악연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이 악연은 순식간에 발화, 2020년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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