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들~ 살아 있어?” 매번 명절 끝 무렵에는 결혼한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아무리 경력과 실력을 두루 갖춘 직장인일지라도, 뭇사람과 토론해도 밀리지 않을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페미니스트일지라도 명절에는 흔한 ‘유교걸’이 되기 마련이다.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에는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한다더라” 등 말로 며느리의 저항을 원천봉쇄하는 남편 원가족의 견제, “작은엄마도 ‘메갈’이에요?” “요즘 젊은 애들은 지들끼리 잘살려고 애도 안 낳는다는데 너희도 그러는 건 아니지?” 등의 곤란한 질문에 묵언수행을 하다가 명절이 끝나면 며칠씩 앓는 친구도 있다. ‘여전히’ 온갖 명절 음식을 하고, 손님상 차리기를 반복하다가 몸살을 앓기도 한다.
비혼으로 사는 딸이라고 하여 다르겠는가. 별안간 온 가족의 걱정거리로 등극하여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무례를 견뎌야 한다. 혹시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집안 공기를 싸늘하게 만든 주범이 되어 “그래, 너 잘났다”라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타박을 듣는다. 누군가의 탄식처럼 ‘가족이 자연재해’라면 명절은 그 재해의 절정이다.
“와~ 젊은 여자 안으니까 좋네”
지난 명절 후 치른 ‘불행 배틀’에서는 후배 ㄱ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명절이 ㄱ에게 최상급 재해가 된 이유는 남편의 사촌 형(대기업 임원·40대 후반)이 한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와~ 젊은 여자 안으니까 좋네!” 조카인 ㄱ의 딸(6세)을 안은 상태로 겨드랑이 간지럼 태우며 놀던 그가 한 말이다. 간지럼 때문에 웃으며 저항하는 ㄱ의 딸에게 이런 말도 했다. “왜 그래, 너도 사실은 좋잖아.” ㄱ의 명절은 그의 말과 행동, 그 상황을 웃어넘긴 가족을 향한 원망, 제대로 분노하며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다는 자책, 딸들을 향한 미안함이 뒤엉켜 엉망이 되었다. 뒤늦게나마 ‘성희롱’에 해당하는 부적절한 말이었다는 문제의식을 전달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괘씸하다” “고소할 테면 하라”는 극단적 분노였다. 형을 향해 ‘예의를 갖춘 사과’를 요구한 ㄱ의 남편은 손윗사람도 몰라보는 싸가지 없는 동생으로 전락했다. ㄱ은 분란을 일으키는 예민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가족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가족은 정지화면 상태다. 사회적 상식은 가족 앞에서 작동을 멈춘다. 최근 쏟아지는 각종 ‘단톡방 성희롱’ 사건의 심각성을 한 번이라도 접했거나,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은 사회인이라면 그 말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어렴풋하게라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의 문제성은 가족 안에서 쉽게 웃음으로 휘발되고, 문제 제기는 괘씸죄에 걸린다. 조카가 예뻐서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가족끼리’가 문제다. 평소에는 불멸의 운명 공동체인 양 강조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차라리 남이라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존중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가족끼리는 그게 불가능하다. 도대체 ‘가족이니까’의 범주에서 온전하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지난 명절 잠정적 실패로 끝난 ㄱ의 저항이 이번에는 마침내 성공하길 바란다. 끝내 사과를 받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배려와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심지어 폭력적인 가족을 ‘정상’으로 여기는 공기는 깨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사느라 수고가 많은 무수한 ㄱ들의 저항 또한 지지한다. 이런 저항이 〈B급 며느리〉의 저자 선호빈 감독의 말처럼, 내가 가족 안에서 누리는 평화가 누구의 일방적 희생에 기반을 둔 ‘비겁한 평화’가 아닌지 점검하고 ‘비겁하지 않은 평화’를 향해 노력하며 변화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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