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 선거 가른 건 타이완 청년의 ‘망국감’
  • 타이완·양첸하오 (프리랜서 기자)
  • 호수 645
  • 승인 2020.01.2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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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총통 선거 결과 차이잉원 총통이 재선에 성공했다. 민진당은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과반을 차지했다. 홍콩 시위와 중국의 위협을 지켜본 젊은 층이 투표에 적극 나선 결과다.
ⓒ양첸하오 제공총통 선거 전날인 1월10일 한 남성이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타이완”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타이완이 될 수 있다. 내일 꼭 한 명 한 명 이끌어 집에 돌아가 투표하라! 홍콩인 올림.’

제15대 총통 선거를 하루 앞둔 1월10일 오후 타이베이 총통부 앞 사거리는 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선거 집회가 한창이었다. 번잡한 와중에도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손 피켓을 본 타이완 시민들은 “홍콩 파이팅!”을 외치며 지나갔다. 이 남성 역시 “타이완도 파이팅! 내일 꼭 투표하세요”라고 일일이 화답했다.

집회가 마무리된 밤 11시께, 타이베이 버스터미널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타이완 중남부 지방으로 가는 버스는 모두 매진되어 다음 날 오후 3시30분에야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공항 역시 투표를 하기 위해 귀향한 인파로 북적였다. 미국 시애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첸여우징 씨(30)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오슝 시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진학 이후 10년 가까이 미국에서 거주 중이었다. 11시간 넘는 비행 목적은 단 하나, 투표였다.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첸여우징 씨에게 홍콩은 ‘남 일’이 아니었다. “친중 세력인 국민당을 막아야 한다. 여론조사로는 차이잉원 현 총통 지지율이 20~30% 앞서고 있지만 안심할 수 없다.”

ⓒAP Photo차이잉원 타이완 총통이 1월11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타이완 가오슝은 한국의 ‘광주’ 같은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가오슝은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피신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권위주의 통치에 정면으로 맞섰던 도시다). 그러나 2018년 11월24일 가오슝의 지방선거에서는 20년 만에 야당인 국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집권세력 민진당은 참패했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성이 큰 이 도시에서 당선된 한궈위 가오슝 시장은 이 승리를 발판으로 이번 총통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만 해도 2020년 선거에서 차이잉원 총통과 민진당 정부가 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이런 와중에서 검은 옷과 마스크를 착용한 익명의 홍콩인이 타이완에 보낸 당부가 시민들을 격동케 했다. 그의 피켓 시위 다음 날인 1월11일 선거 투표율은 74.9%로 2016년에 비해 8.6%포인트 올랐다. 총통 선거(대선) 개표 결과 민진당 후보인 차이잉원 총통은 817만 표(57.1%)로 재선에 성공했다. 국민당 한궈위 후보는 552만 표(38.6%)에 불과했다. 동시에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총선)에서도 민진당은 강세를 보였다. 61석을 얻으며 총 113석 중 과반을 차지했고, 정치 신인 다수가 국민당 강세 지역에서 당선되며 의미를 더했다.

선거를 앞둔 정당들은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다니듯, 총통 후보가 입법위원 후보들과 유세를 함께 다니곤 한다. 하지만 한궈위 총통 후보는 겨우 1년 사이에 입법위원 후보자들이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다. 친중파인 한궈위 시장은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데 거침없었다. 2019년 5월 가오슝 시의회에서 열린 시정질의가 대표적이다. 가오민린 민진당 시의원은 중국과 경제협력을 추진하려고 하는 한궈위 시장에게 어떤 방식으로 협력이 추진되는지 물었다. 한 시장은 “제가 타이완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신보다 적지 않다”라고 답하는 등 질문을 피해갔다.

ⓒEPA1월11일 한궈위 후보(가운데)가 선거 패배를 시인하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러다 타이완이 망한다”

동문서답은 시정질의 때마다 반복됐다. 논란이 커지자 국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시의회는 아예 시정질의 운영방식을 바꿔버렸다. 과거에는 등록 절차만으로도 질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등록자 중 추첨을 거쳐 ‘당첨’된 의원만 시장에게 질의할 수 있다. 가오민린 시의원은 “질의권을 박탈당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질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된 직후 한궈위 시장 지지자들에게 수없이 시달리기도 했다. “사무실로 협박 전화가 걸려오거나 SNS를 통해 ‘당신을 죽이겠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궈위 시장 저격수’는 시장 지지자들의 폭언에 기죽지 않았다. 가오민린 시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한궈위 시장은 지각, 조퇴, 결근을 일삼았다. 2019년 9월에는 일본에서 온 학자들과 접견하는 자리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오늘은 제가 지각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 손님을 25분이나 기다렸다”라고 언론에 이야기한 게 화근이었다. 보도를 접한 일본 학자들은 한궈위 시장 측이 약속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바꿨다고 SNS에 폭로했다. ‘타이완의 국제 이미지가 손상됐다’는 여론의 비판이 거셌다. 한궈위 시장의 능력과 자질도 입길에 올랐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견고해 보이던 한궈위 시장의 지지율은 홍콩에서 시작된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시위가 거듭될수록 주저앉았다. 타이완 시민들은 홍콩 경찰의 무력진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차이잉원 총통은 동요하는 민심을 붙잡기 위해 여러 차례 홍콩 시위와 관련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타이완은 일국양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강조했다. 홍콩을 응원하는 동시에 타이완 국민을 향한 ‘공약’이 담긴 메시지였다. 한궈위 시장은 차이잉원 총통과 민진당이 홍콩 시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시사IN> 제626호 ‘타이완 총통 선거 변수로 떠오른 홍콩’ 기사 참조).

총통 선거를 열흘 정도 앞둔 지난해 12월29일 토론회는 ‘결정타’였다. 장기화되고 있는 홍콩 시위에 대한 질문이 여럿 나왔다. 홍콩 시위 여파는 국가안보 관점에서 타이완에 매우 중대했다. “베이징 당국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타이완의 주권, 존엄, 민주와 자유를 지키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 후보는 기자를 질타하는 방식으로 답했다. “당신의 질문이 타이완을 편협하게 만들고 있다. 당신이 가진 이데올로기가 스스로를 묶고 있다. 나는 타이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우리는 모두 타이완에서 죽고 묻힌다. 우리가 이 국가를 수호하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 정작 어떤 방법으로 국가를 수호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회피했다.

지난해 타이완에서는 ‘망국감(亡國感)’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말이었다. 홍콩 시위와 중국의 위협을 지켜본 젊은 층이 특히 ‘망국감’에 공감했다. 이들에게 한궈위 후보는 필사적으로 당선을 막아야 하는 대상이다. 한 30대 유권자는 “한궈위 후보 같은 사람이 타이완을 대변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부끄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차이잉원 총통의 앞길

국민당 내부에서도 한궈위 후보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국민당 원로인 자오서우보 전 행정원(내각) 비서장은 한궈위 후보에게 공개적으로 언행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정작 선거팀은 당내 원로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오서우보 비서관은 한궈위 후보 지지자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자오서우보 비서관은 총통 선거 패배 원인을 이렇게 짚었다. “가오슝 시장에 당선되면서 임기를 다 채우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불과 몇 개월 사이 총통 출마선언을 했다. 그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겠지만, 중도층은 약속을 가볍게 뒤집는 사람에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불투명한 행보를 보이면서 차이잉원 총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한 후보를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한궈위 후보가 중도층 지지율을 깎아먹는 동안 민진당은 쇄신을 거듭했다. 특히 망국감을 느끼고 있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데 힘썼다. 2014년 ‘해바라기 학생운동(중국과의 무역협정 반대를 위한 국회 점거시위)’을 이끌었던 린페이판을 당 부비서장으로 영입해 정책 및 선거전략 결정권을 주었다. 또 차이잉원 총통은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던 쑤전창 전 주석을 행정원장(총리)으로 임명하며 정부 차원에서 신속한 여론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행정원 공식 SNS 채널을 적극 활용해 실시간으로 가짜 뉴스에 대응하고 정책 설명을 이어갔다. 차이잉원 총통은 개인 유튜버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스스럼없이 질의응답을 나누기도 했다. 콜라스 요타카 행정원 대변인은 “개혁 과정에서 소통이 부족하면 여론의 불만을 초래한다는 걸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배웠다. 인터넷과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할 필요성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역대 최고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 차이잉원 총통과 민진당의 앞길은 꽤 험난할 예정이다. 민진당 당선은 중국 정부가 원하지 않은 결과다. 타이완 정치계와 학계는 중국 정부의 강압이 더 거세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타이완 정치 분야 전문가인 천팡위 미국 워싱턴 DC 싱크탱크 방문학자는 “중국은 점점 더 타이완의 여론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이 경우 협상이나 담판도 불가능해진다. 민진당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좁아지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멍즈청 타이완 성공대학교(國立成功大學) 정치학과 교수는 중국과의 관계보다 타이완 내부 정치에 더 방점을 찍었다. “차이잉원 총통의 이번 승리는 양안(兩岸:중국과 타이완) 관계에 크게 힘입었다. 하지만 타이완 내부 경제 문제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면 언제든 한궈위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이 등장할 수 있다.”

한편 총통 선거에서 패배한 한궈위 후보는 가오슝 시장직으로 돌아가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다. 가오슝 시민단체연합이 시장 탄핵 절차를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민소환제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이르면 5~6월쯤 한 시장의 파면을 다투는 찬반투표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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