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지은 데로 가고 물은 트는 데로 간다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45
  • 승인 2020.01.3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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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한 성락현은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에 찬성한 뒤 여당으로 가서 금배지를 단 ‘배신의 정치인’이다. 그는 여고생과의 성추문을 일으켜 몰락했다.
ⓒ연합뉴스1978년 8월11일 새벽 성락현 전 의원(오른쪽)이 구치소행 승용차를 타고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단임제다. 즉 한 번의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다시 출마하거나 재집권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지. 단임제의 시초는 제5공화국 헌법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단임제를 무슨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되풀이해 선전하고 다녔다. “대통령이 7년 이상 재임하지 못할 것이며 이는 한국이 한 번도 이룩해보지 못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줄 것(〈매일경제신문〉 1980년 11월19일)”이라면서 말이야. 자신을 믿어달라고 강변하며 이런 말도 했지. “7년 단임제에 대해 잘 믿지 않고, 심지어는 대통령의 임기 조항을 개정할 경우에는 당시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는 새 헌법안의 내용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경향신문〉 1980년 10월14일).” 이걸 보면 당시 한국 사람들이 헌법을 뜯어고치며 임기를 늘리는 대통령을 얼마나 지긋지긋해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한국 록의 전설 신중현이 1974년 발표한 노래 〈미인〉이 슬그머니 금지곡이 되어버렸던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단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이를 어떤 불온한(?) 젊은이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부르며 자꾸만 “나 또 대통령 할래” 하고 나서는 대통령을 비꼬았던 거야. 이를 불쾌하게 여긴 당국이 이 노래를 금지곡 리스트에 넣어버렸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려 했던” 대통령의 ‘원조’ 이승만이 참담히 몰락한 역사를 겪었음에도 후임자 박정희는 똑같은 야욕을 품는다. 대통령에 재선된 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이 금지하고 있던 대통령 3선의 길을 터놓기 위한 작업을 개시했지.

1969년 1월7일 윤치영 공화당 의장은 이런 발언을 해.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국민적 과업 완수가 가능하다. (…) 나라를 위해 헌법이 있는 것이지, 헌법을 위해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발언이 나오자 야당은 발끈했지. 그러나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면서 3선 개헌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라버렸다. “나의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며 (그렇습니까?) 꼭 개헌할 필요가 있으면 (응?) 연말이나 내년 초에 다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뭐라고?)”

야당은 당연히 거세게 반발했고 여당 내에서도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많았어.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 할 기세로 개헌을 거듭하고 부정선거까지 감행하다가 몰락한 게 10년도 채 안 되었는데 또 헌법을 뜯어고쳐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겠다니 말이 되는가 말이지. 결국 전가의 보도,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여당 의원들을 윽박지르고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직접 나서 어르고 달래서 반대파들 각개격파에 나섰지. 야당 의원들에게도 온갖 협박과 회유를 쏟아붓게 돼.

그 와중에 발생한 게 김영삼 당시 의원에 대한 질산 테러 사건이었어. 1969년 6월20일 밤, 김영삼 의원이 귀가하던 길에 웬 청년들이 승강이를 벌이며 길을 막았어. 차가 멈춘 틈을 타서 또 다른 남자가 불쑥 차 문을 열려 했지. 다행히도 김영삼 의원은 미국 방문 시 익혔던 습관대로 차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해. 괴한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걸 보고는 기사에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 소리쳤지. 괴한은 꺼낸 물건을 자동차 창문에 던졌는데 그 정체는 차창이 녹아내릴 정도로 독한 질산이었어. 직접 공격을 받았다면 김영삼 의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모를 테러 공격이었어.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단다.

질산 테러 같은 무리한 짓이 아니어도 야당이 개헌안을 막을 방법은 없었어. 1967년 6월8일 치러진 7대 총선은 부정이 난무한 선거였으니까. 선거를 앞두고 야당에서 “일선 행정기관, 경찰, 공화당 등이 삼위일체가 돼 최대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6·8 선거는 사상 유례없는 망국적 이상 선거가 되고 있다(〈경향신문〉 1967년 5월31일)”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지. 그 결과 여당은 3선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했어. 여기에 야당인 신민당의 힘을 쏙 빼는 사태가 더해졌어. 야당 의원 세 명, 성락현·조흥만·연주흠 의원이 개헌 찬성 선언을 해버린 거야.

검찰, 성락현을 ‘다른 건’으로 구속

이 세 명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야당 당원들이 세 의원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거행하려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벌어질 지경이었어. 이 ‘변절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신민당은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을 감행한다. “당시 정당법은 정당을 해체하면 의원직을 자동으로 상실하게 돼 있었다. (…) 신민당은 소속 의원 전원을 변절자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당기위에 회부, 제명해놓고 당 해체를 결의한다(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셀프 제명을 통해 자신들의 당을 깨고 ‘배신자’ 3명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일종의 자폭 공격을 감행한 거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14일 새벽 3시, 마치 군사작전 하듯 개헌 찬성 의원에게만 전달된 장소인 국회 별관 특별회의실에서 3선 개헌은 통과됐다. 의사봉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이효상 국회의장은 주전자 뚜껑으로 단상을 두들겼다고 해.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깡 깡 깡.”

첨예한 대치 국면에서 자기편을 향해 총질하듯 3선 개헌 지지 선언을 했던 의원 3인 가운데 성락현을 주목해보자. 그는 여당으로 갈아타서 또 국회의원이 됐지. 그런데 1978년 어마어마한 추문의 주인공이 된다. “길에 있던 여고생 3명을 차에 태워 시내까지 데려다주었는데 (…) 성씨가 고고클럽에 한번 놀러가자면서 연락처를 알려주었다고 (…) 여고생 1명이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그 후 같이 고고클럽에도 가고 함께 양주를 드는 등 즐기는 횟수가 빈발 (…) 접촉이 잦아짐에 따라 그중 1명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켜 산부인과 병원에까지 갔었다고(〈경향신문〉 1978년 8월7일).”

즉 국회의원이라는 작자가 길거리에서 여고생들 꼬여서 난봉질을 하고 다녔고 임신했다는 내용이야. “당시 54세였던 성 의원의 행각은 그의 ‘파트너’였던 여고생의 학교 소지품 검사 때 가발, 거액의 현금과 10만원권 수표, 콘돔 등이 적발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시사저널〉 2015년 8월27일)”라고 하니 그 추잡함을 짐작해볼 수 있지 않겠니. 그런데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죄는 친고죄, 즉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하는 범죄야. 성락현은 잽싸게 피해자와 합의를 봤고, 정작 간음죄로는 처벌할 수 없게 돼 검찰은 주변을 탈탈 털어서 다른 혐의로 그를 구속시키는 수고를 해야 했지.

성락현은 사건이 드러나기 전 기민하게 의원직을 사퇴하고 탈당했어. 여당은 이 이유를 ‘국회 내무위 유럽 시찰 중 개별 행동’을 한 것으로 둘러댔다가 망신을 샀어. 3선 개헌 당시 국회의장으로서 주전자 뚜껑을 두들겼고 1978년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이효상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처음에 왜 바른말을 안 했느냐는 얘기가 있는데 너무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라 ‘입이 부끄러워’ 그렇게 됐다.”

성락현 전 의원은 지금도 그 추문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김재규(박정희를 쏘았던 그 사람)의 정치공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러나 아빠는 그 말에 믿음이 가지 않을뿐더러, 그게 사실이라 해도 공작에 넘어가 여고생과 놀아난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의 회유에 넘어가 당을 배신하고 3선 개헌을 지지했던 사람의 자업자득이겠지. 죄를 지은 사람들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겠니. 비록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 속담처럼 “죄는 지은 데로 가고 물은 트는 데로 간다”라고 믿는 게 우리의 정신건강에 유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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