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2016년 3월,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이 제대로 음미되기도 전에, 정치인과 기업가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정치적 유행어 속에 알파고의 충격을 묻어버렸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그 실체가 명확해지기도 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개혁이나 개선을 바랐으나 번번이 좌절을 맛본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지렛대로 동원되었다. 경제계와 과학기술자들은 규제 철폐와 정부 간섭 최소화를 얻기 위한 수사로, 교육자와 예술가들은 창의력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용어를 활용한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말이지요’라면서 말이다.

알파고 충격 이후, 인공지능(AI)과 포스트휴먼(posthuman) 논의를 아우르는 국내 철학자들의 책이 몇 권 나왔으나, 최근에 출간된 김진석의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인간 강화와 인간 잉여의 패러독스〉(글항아리, 2019)는 가장 흥미롭고, 강렬한 데다가, 심란하기까지 하다. 혹시 단테라면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이렇게 경고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는 인간이라는 가상(假像)을 내려놓으라!”

인공지능 로봇이 바둑의 최고 명인을 이겨버리자, 각계의 지식인들은 ‘그래도 로봇이 인간과 같아질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인공지능에는 인간에게 있는 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비교는 데카르트가 마음과 물질로 인간을 나누었던 심신 이원론을 되풀이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돌도끼·호미(철)·컴퓨터와 연결되면서 각기 다른 의식을 발전시켜왔지 의식이 독자적으로 있지 않다. “인간이 한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술이나 기계가 대상으로 다른 편에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이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조합되고 결합되는 연결망만 있을 뿐이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스마트폰을 놓을 수 없는 현대인에게 마음과 물질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의 기능적 수월성에 놀란 사람들이 인간의 특이성은 감정과 감성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인공지능에는 그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이 초래하는 문제들과 힘겹게 씨름하면서, 술이나 약물에 취하고 어떨 때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평생 동안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여러 심리적 장애와 우울증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이, 자기도 제대로 조절 못하는 감정을 굳이 로봇에게까지 불어넣을 필요는 없다.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인간 강화와 인간 잉여의 패러독스〉 김진석 지음, 글항아리 펴냄

인간주의는 오히려 배격해야 할 가치

인공지능에 도덕성을 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덕성이 무엇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오래전에 니체가 갈파했듯이 도덕성은 그 자체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무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복잡한 권력관계를 은폐하는 수단이다. 또 인공지능에는 자율성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는 근대 이후에 나타난 생소한 개념인 데다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자율성은 항상 시대적 조건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공부 잘하는 내 아이가 가야 할 대학교와 학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내가 읽어야 할 책은 나보다 아마존이 더 잘 안다.

또한 인공지능에는 창의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꼬투리는 마치 모든 인간에게 창의성이 있는 것처럼 전제하지만, 사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도리어 창의성을 ‘미친 짓’으로 여기고 때로는 천재를 핍박한다. 인간은 창의성보다는 안정된 진부함을 반복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인간의 창의성이 기행과 실수, 운과 주위의 조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하다. “인공지능에게도 그런 오랜 학습 시간과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가 우선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창의성이 인간 고유 재능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인공지능에게도 사회 속에서 인간 및 자연 그리고 역사와 상호작용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창의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연거푸 제시한 인간주의적 기준은 매우 추상적이고 역사적이다. 게다가 인간주의라는 보편적인 기준이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타자에게 폭력과 배제를 저질러온 인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인간주의는 오히려 배격되어야 할 가치다(인간주의가 폭력을 휘두른 타자에는 지구와 동물도 포함된다). 인간의 이성이나 마음은 아직 그 비밀이 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신비가 아니다. 그 비밀이 다 공개된 다음에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밀어내거나 로봇과 공생해야 하는 지위로 추락시키고, 다른 한편 생명공학적 개입을 통한 인간 강화(human augmentation)는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ch)’을 실현시킬지도 모른다. 추락과 상승이라는 양편으로 열린 가능성에 침식된 인간은 더 이상 예전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지동설, 진화론, 무의식의 발견 등에 의해 점진적으로 자기 위상에 상처를 입어온 인간이 어쩌면 이번 타격으로 아주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기계는 이미 감성적 영역을 제외한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인간보다 월등한 수준에서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충격은 과거의 그 비슷한 것들과 비교할 때 수준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특이점이 온다고 해서 인간더러 반드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지은이가 내놓은 인간 생존의 방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대립이라는 모호한 가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등장할 인공지능 로봇들이 순전히 기계이기만 할 리는 없다. 뇌-컴퓨터의 연결을 추진하는 과학기술은 다름 아니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사이보그를 탄생시키려 한다.” 자신의 신체와 지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중지하거나 그런 수단을 포기한 적이 없었던 인간에게 사이보그는 인류 역사에 이미, 항상 도래해 있었던 친척인지도 모른다. 한번 인간 강화의 둑이 터지면 누구도 그 혜택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사이보그가 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차이와 차별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집단적으로 잉여가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치밀한 탐구와 검토를 담고 이 책은 뛰어난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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