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키드의 씁쓸한 추억
  • 김문영 (이숲 편집장)
  • 호수 644
  • 승인 2020.01.22 22: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영장의 냄새〉
박윤선 지음
창비 펴냄

냄새는 많은 것을 환기한다. 어느 시간, 어떤 장소에서 맡은 냄새는, 그 냄새와 결합된 기억을 불러와 불시에 우리를 시간 여행으로 이끈다. 〈수영장의 냄새〉는 작가의 개인적 기억을 환기하면서(수영장 냄새는 아마 소독약 냄새겠지만 더 나은 환경을 위한 관리의 과정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아파트 키드로 대표되는 고도성장기의 30여 년 전 사회상을 소환한다.

주인공 ‘민선’의 엄마는 늘 바쁘다. 집안 살림을 도맡으면서 증권과 부동산에 관심을 둔 엄마 덕에, 민선이네는 서울 변두리에서 갑자기 ‘부’의 상징으로 떠오른 대형 아파트 단지에 입성한다. 넓은 집으로 이사해서 좋겠다는 이웃들의 말을 들으며 아파트촌에 들어왔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좀 버거운 동네였다. 여전히 낡은 가재도구로 넓은 집을 채우고, 집값이 오르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국민학교’ 2학년생 아파트 키드 민선과 그의 언니 민진은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스포츠센터’에 다니며 수영을 배우고 시계추처럼 학교와 집과 학원을 오간다.

이 책은 고도성장의 미명 아래 대부분 서울시민이 통과했던 공통분모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온통 푸른색으로 채워진 만화는 ‘수영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파란 수영장 바닥을 배경으로 삼았다. 파란 배경은, 유년의 기억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어서 서늘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을 표현하는 데 일조한다. 게다가 작가는 인물과 대상의 많은 부분을 생략한 독특한 그림체로 마치 우리의 미완성 유년을 훔쳐보는 듯한 작화적 완결성을 보여준다.

엄마의 억척스러운 거짓말

어린 시절의 우리는 많은 것에 미숙하다. 부모가 가장 좋은 교사여야 할 텐데, 돈 버느라 식구들의 얼굴조차 마주할 시간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며 부모의 시간을 대체했다. 자녀들은 형제자매나 또래 친구와의 관계를 전부로 여기고 좌충우돌하며 스스로 성장한다.

작가와 세대는 다르지만, 필자도 비슷한 유년 과정을 겪었다. 절약이 최고의 미덕이던 시절, 엄마는 나와 함께 버스를 탈 때면 버스값을 아끼려고 나를 ‘여섯 살’로 소개했다. 나는 이미 초등학생이었는데 말이다. 〈수영장의 냄새〉를 보며 그 억척스러운 거짓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민선의 언니 민진이 다쳐 더 이상 수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자, 엄마는 미리 낸 학원비가 아까워 억지로 민선을 상급반 수영반에 넣으며 기초 수영을 다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라고 시킨다.

이런 일화 외에도 어린 시절에 또래끼리만 알고 있던 많은 비밀, 그 어두운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만이 알고 있던 죄책감과 후회는 그렇게 냄새와 함께 상기된다. 그리고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조리한 사회 규칙을 은밀히 배워나가야 했던 그때 그 시절.

만화의 도시, 프랑스 앙굴렘에 머물며 10년째 작품 활동을 하는 박윤선 작가는 2019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어린이 만화로 공식 수상 후보에 오른 이래, 올해도 남편과 함께 나란히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아동서 작업에 매진하지만, 그래픽노블 작가로서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