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넘쳐나는 ‘맛맛맛 맛집’의 요리들을 단박에 뛰어넘는 공선옥의 음식 산문집 〈행복한 만찬〉을 읽으면서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나이로 치면 나보다 아홉 살 많을 뿐인데 그가 풀어내는 음식담은 수십 년을 건너온 듯 아득하게만 들렸다. 고구마, 쑥, 감자, 보리밥, 감, 쌀밥, 무, 콩, 시래기… 그의 음식 목록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자연의 호사로 넘쳐난다. “그 곡물과 채소와 어패류와 향신료와 열매와 뿌리와 그것들이 그 속에 내장한 그 내력들이 나를 키웠다. 나는 그것들을 먹고, 그것들이 모양으로 맛으로 향기로 빛깔로 말해주는 소리를 듣고, 그것들이 보여주는 몸짓을 보며 컸다. 내가 먹고 큰 그것들을 둘러싼 환경들, 밤과 낮, 바람과 공기와 햇빛,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 감정들이 실은 그것들을 이루고 있음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작가 공선옥의 “전남 곡성의 자연이 나를 키웠다”라는 말에 대꾸하자면 기자는 ‘도시 서울이 나를 키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밀에 대해 말하는 법도 다르리라. 공 작가는 하얀 밀꽃에 대한 예찬과 밀밭에 깃든 남녀상열지사를 술술 엮어내겠으나, 나는 도시락통만 한 크기의 급식빵으로 밀을 기억할 뿐이다. 

나는 수입 밀 세대다. 1956년에 시작해 1981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밀 원조. 덕분에(?) 우리 밀의 생산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고 쌀 다음으로 소비가 많은 밀가루의 자급률은 현재 0.2∼0.3%에 지나지 않는다. 매년 350만t가량이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중국 등지에서 수입된다. 그런 형편으로 수입 밀가루 세대는 밀밭을 밟아본 적도 없고, 밀(소맥)과 보리(대맥)를 구분할 줄도 모른다. 밀은 가을에 씨를 뿌려 늦봄에 수확한다는 사실도 교과서에서 배워 안다. 수입 원맥을 빻아 각종 방부·표백 처리한 ‘하얀 밀가루’가 우리 세대가 접해온 밀에 관한 태초의 모습이다.

‘수입 밀가루’ 세대의 비극

밀을 모르는 것과 밀 음식을 먹는 것은 별개다. 수입 밀 세대는 밀가루 음식 천국에서 살고 있다. 그 소비량은 쌀의 절반쯤에 해당해, 우리나라 국민은 1년 동안 밀을 35kg 먹는다. 그중 36%가 국수·라면 같은 제면용으로, 24%가 제과제빵용으로 소비된다. 금기가 욕망을 부른다 했던가? 밀가루 음식을 끊기로 하자 전에 없던 식탐이 생겨났다. 유혹은 도처에 깔려 있다. 떡볶이, 튀김, 라면, 국수, 지짐이, 스파게티, 과자, 빵… 거리의 먹을거리는 온통 밀가루 천지다. 어떤 때는 일부러 마스크를 썼다. 거리로 새나오는 빵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회사 한 귀퉁이에 쌓여 있는 야식용 사발면을 먹는 동료의 후루룩 소리도 침샘을 자극했다. 지난 주말 이웃집에서 가져다준 김치전 석 장은 고스란히 남편 몫이 되었다. 가장 쥐약인 건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있는 붕어빵과 떡볶이 포장마차를 지나치는 일이다.

밀가루 끊기 일주일째. 나는 왜 이 짓을 하는가. 밀이 뭔 죄라고. 유난하다 힐난할 수 있겠다. 밀은 무죄다. 곡물 중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되기 시작한 밀은 그 기원이 기원전 7000년쯤 된다. 유럽 역사에서 밀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고, 제분은 신의 사도인 수도사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눈같이 곱고 하얀 밀가루는 어느새 ‘백색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한 방송에서 수입 밀과 우리 밀에 각각 바퀴벌레를 넣었더니 이틀 후 수입 밀의 바퀴벌레는 모두 죽었다는 내용을 보도하자 인터넷이 또 한번 들썩였다. 놀라지 마시라.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수입 밀을 쥐에 먹여봤다거나, 개미·바구미 등에게 먹여봤다는 벌레 생체 실험 결과치가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수입 밀가루의 문제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건 1993년이 마지막. 목포와 부산으로 들어온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산 수입 밀가루에서 허용치의 132배에 달하는 농약이 검출된 사건이다. 그 이후 국회와 민간 차원에서 정부를 상대로 농약 잔류 검사를 요구했지만 결과는 늘 ‘기준치 이하’로 나왔다. 농민 출신 강기갑 의원(민주노동당)이 실시한 검사에서도 이상 있다는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준치 이하=안전하다’고 단정해도 좋을까? 대한제분, CJ제일제당과 같은 거대 수입 밀가루 업체들은 그렇게 답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안전성은 다르다. 우선 나부터 부엌에 있는 3년 된, 벌레도 꼬이지 않고 변색도 안 되며 썩지도 않는 밀가루 한 통을 어찌 봐야 할지 난감하다. 소비자단체들이 약품의 발전(?)으로 기존 검사 방식이나 허용 기준치로는 ‘무사 통과’라며 수입 밀가루에 대해 더욱 엄격한 테스트를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간의 의혹이 쏠리는 수입 밀가루의 처리 단계는 ‘수확 후(postharvest)’ 과정이다. 수확한 뒤 배에 선적되기 전 곡물 벨트 위에 올려진 원맥(제분되기 전 상태)에는 살충제 등을 듬뿍 뿌린다. 유통 기간을 버티기 위해서다. 밀을 선적한 배가 20∼40여 일 동안, 그것도 뜨거운 적도를 통과하려면 얼마나 강한 방부제를 뒤집어써야 할까? 여기에 밀가루 끊기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있다. 바로 안전 문제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부드럽고 쫄깃하고 하얀’ 게 인기 있는 세상 인심에 반해 ‘거칠고 거무튀튀하고 질긴’ 쪽으로 식문화를 실천해보겠다는 것. 밀이 빵이 되고 국수가 될 수 있었던 비밀, ‘글루텐’ 유혹에서 벗어나보련다. 100년 전만 해도 글루텐 함량이 요즘 밀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더 쫄깃한 국수와 더 바삭한 과자’를 만들기 위해 글루텐 함량이 높은 밀로 품종개량을 거듭해왔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알 수 없는 뒤끝, 가령 소화불량, 복부팽만감, 두드러기 등의 증상이 발생하는 것도 글루텐이 지방의 영양대사를 교란하기 때문이라니, 간사한 혀가 몸의 수난을 자초한 거다.

재작년부터 밀가루 가격이 치솟고 있다. 주요 밀 수출국들이 가뭄과 냉해로 수확량이 줄었고, 이어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곡물 메이저들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 상승이라는 국내 요인이 가중되면서 밀가루를 재료로 하는 식품의 가격이 줄줄이 오르고 있다. 세계 제2의 밀 수출국인 중국의 가뭄 소식은 추가 상승 요인을 남겨두고 있다. 꼭 암울한 소식만은 아닌 게, 그 덕에 우리 밀과 수입 밀의 가격차가 1.2∼1.5배까지 좁혀졌고 국내 제분업체들의 우리 밀 주문량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을 벌인 지 올해 꼬박 20년. 식량주권을 생각하며 밀가루 음식과의 한 달 일전을 벌여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리라. 참, 일찌감치 밀가루 끊기를 실천하고 계신 독자들의 경험담도 대환영이다. 뭐가 달라졌나, 궁금하다.

기자명 박형숙 기자 다른기사 보기 phs@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