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관심은 참 미묘하다. 지나친 관심도 문제고, 관심이 아예 없어도 문제다. 사람들은 늘 묻곤 한다. 관심의 선이 어디냐고. 선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주는 피곤함으로 관심을 끊고 사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혼술, 혼밥에 이어 일도 혼자 하는 게 대세다. 혼자면 외롭다고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외로움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생각도 한다. 게다가 혼자이면서도 고립되지 않는 연결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선’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선이 아니라 공간이 문제다. 어떤 공간이냐에 따라 관심이 폭력일 수 있고, 무관심이 폭력일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내가 지금 어떤 공간에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무관심이 존중인 공간이 있다. 대중교통수단인 택시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택시를 탈 때 긴장한다. 택시 기사가 무슨 말을 어떻게 걸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용히 가고 싶지만 택시 기사들은 정치에서부터 지역 이슈까지 다양하게 말을 건다. 여성들은 반말이나 깔보는 말, 성희롱과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공간에서는 무관심이 존중이고 배려다. ‘예의 바른 무관심’이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2015)에 잘 소개되어 있다. 그저 그런 무관심이 아니라 배려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하며, 있어도 없는 척해야 한다. 이 예의 바른 무관심을 ‘시민적 무관심’이라고도 한다. ‘시민적’이라는 말에 집중하면 통상적인 의미의 예의 바른 무관심을 넘어 좀 더 적극적인 ‘시민 됨’의 윤리가 생긴다. 즉 친밀한 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노인도 아니라 그저 ‘시민’, 나와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로 존중하는 정제되고 배려된 무관심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는 친밀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친밀감을 느끼지 못할 때 벌어진다. 이 두 경계에 걸친 미묘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활동단체, 사회적 공공영역이 대표적이다. 이런 영역에서 관계를 규율하는 원칙은 사랑이나 우정과는 다르다. 관계가 발달해 우정으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사적인 관계’로 진화되어 완전히 영역이 달라지는 경우다.

이 영역에서 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시민적 관심과 다르지 않은 ‘비인격적 관계’다. 삭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비인격적 관계에선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이나 대화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침해가 된다. 비인격적 관계에서 ‘인격(personality)’은 타인의 사생활(privacy)과 신상(personal details)을 의미한다. 개인의 생활(personal life)이 곧 인격이다. 그의 사(私:personal)를 세심하게 보호해주는 것이 관심이며 존중이다.

친밀성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타인에 관한 관심은 우정과 사랑의 원리에 기초한다. 우정과 사랑의 원리는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결합을 추구한다. 물론 이 인격적 결합을 시도할 때마다 서로가 ‘같다’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이와 자신과의 ‘차이’, 그를 통해 자신도 알지 못하던 내부의 차이를 발견한다. 이런 만남이 기쁨이 되는 관계가 사랑과 우정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우정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는 무관심이 시민들 사이에 지켜야 하는 가장 좋은 관계인가? 시민적 무관심의 영역에서는 타인에 관한 관심을 끊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민적 무관심’은 관심 자체가 ‘시민적’이어야 하며 타자를 ‘시민’으로 바라보라는 요구이다. 무관심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시민적’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두가 시민이 되는 사회 만들어야

시민으로서의 관심, 시민에 관한 관심이란 어떤 것일까? 공공영역에서 만나는 상대방에 대해, 그 개인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존재가 환기하는 시민적 관심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신상 정보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민적 삶에 관한 관심이다.

예를 들어보자. 12월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당신이 HIV 감염인을 만났다고 하자. 그 사람과 개인적 친분이 있더라도 그가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먼저 말하거나 묻지 않는 게 시민적 무관심이다. 그가 감염인이라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감염되었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 등에 관한 물음은 관심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침해다. 대신 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그가 사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기 전에는) 시민으로서 삶에 관한 관심으로 돌려야 한다. 한국에서 HIV/AIDS에 관한 무지와 혐오가 얼마나 심각하며, 감염인들이 어떤 사회적·정신적 타격을 받으며 살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면 된다. 개인의 사적 기록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삶의 공적인 부분에 관한 관심. 이것이 타자에 관한 관심이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타자성을 어떻게 배제하고 억압하고 생산하고 관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바로 시민으로서의 타자에 관한 관심이다. 개인이 아니라 시민에 관한 관심(누가 시민이며, 누가 시민이 아닌가, 누구를 시민으로 여기고 누구를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가)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시민이 아닌 사람은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어떤 이야기에 솔깃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솔깃함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관심이다.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가?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환기하는 사회적 주제에 관심을 갖는가? 나는 어느 쪽에 솔깃한가? 시민적 무관심을 유지하며 동시에 시민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오로지 상대방의 사적 기록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유형의 사람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지 너무나 명확하다. 전자는 모두가 시민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후자는 사회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나아가 사회를 파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미디어와 관계망, 사회적 공간이 있다. 이런 장치가 우리들을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솔깃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사람들 대부분은 장치가 만든 흐름에 따라 흘러간다. 그래서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닌 사회 통치가 된다. 타인의 사적 기록에 대한 관심을 시민으로서의 관심으로 돌리고, 시민으로서의 관심에 더 솔깃함이 이 통치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 되어야 하고, 서로 시민으로 만나야 한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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