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수족 자처한 국회의원들의 굴욕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42
  • 승인 2020.01.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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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의 주역은 이승만 대통령과 남송학, 김익노 같은 국회의원들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의 개헌 시도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면서 독재자는 더욱 거침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연합뉴스1951년 12월20일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개회된 국회에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참석했다.

국회의사당 건물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니. 국회에 가면 장대한 기둥들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데 이 기둥들은 앞쪽과 뒤쪽 각 8개와 양옆 4개씩 모두 24개야. 전면의 기둥 8개는 ‘8도’ 즉 전국을 상징하고, 24개의 기둥은 1년 24절기를 의미한단다. 즉 ‘전국에서 온 국민대표 여러분은 1년 내내 국민을 잊지 마시라’는 뜻이겠지.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국회 천장 조명은 365개로 맞췄다고 해. ‘365일 내내 일하시라’는 걸까. 전쟁이 나면 돔이 열리고 로봇 태권브이가 나올 거라는 농담의 소재가 됐던 국회 지붕 돔에도 ‘국민의 다양한 의견들이 찬반 토론을 거쳐 하나로 모아지는 의회 민주정치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그럴듯한 해석이 덧붙여져 있어.

이런 해석이나 기원과 달리 국회는 항용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해.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무능과 탐욕에 분노한 나머지, 국회의원 수를 팍팍 줄여버리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아빠는 그 말에 반대한다. 국회의원 수를 줄인다면 그 권력의 크기는 더 커지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아져 국회의원들이 과로사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2020년 봄, 또 한 번의 총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국회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역사 그 자체란다. 우리 현대사에 영광과 오욕이 뒤섞여 있듯 국회의 역사 또한 그럴 거야.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새삼 쳐다보기조차 싫은, 하지만 반드시 직시해야 하는 국회의 과거사, 또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과정에서 벌어졌던 흑역사 몇 편을 돌아보고자 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애써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드는 ‘업적’은 그가 한국전쟁을 이끌며 견결히 공산당과 투쟁해 이 나라의 적화를 막았다는 거야. 아빠는 이승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보존됐다고 말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전쟁 초반 대전으로 내뺀 뒤 “서울 사수”를 부르짖은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고, 전쟁통에 금싸라기보다도 소중한 장정들을 소집하여 생으로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인 국민방위군 사건도 있었지. 그중에서도 1952년 5월26일 그가 주도했던 ‘부산 정치 파동’은 그야말로 엽기적이었어.

총리는 뺨 맞고 국회의원은 갇히고

당시에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했어. 이승만은 재선 전망이 어두워지자 1951년 11월30일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는 안을 공표해. 당연히 국회는 이를 부결시키고 되레 내각제 개헌안을 내놓았어. 그러자 피란 수도 부산은 갑자기 구름같이 일어난 ‘민의’에 뒤덮이고 말았어. 이 민(民)은 진정한 의미의 민(民)이 아니었단다. 깡패들이었지. 이름도 무시무시한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이 이승만 박사 만세를 부르짖으며 도심을 누비고 다녔어.

마침내 이승만은 1952년 5월25일 부산, 경남, 전남·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에 2개 대대 병력을 투입할 것을 육군본부에 명령했어.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거부하자 이승만은 헌병 사령관 원용덕을 동원했지. 5월26일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가 헌병대에 끌려가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중 국회의원 12명은 숫제 ‘국제공산당’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어. 이른바 5·26 정치 파동이었지.

국회는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을 내며 저항했고 한국 재건을 위해 설립된 언커크(한국통일부흥위원단)도 헌법 질서를 지키라며 목소리를 냈어. 부통령 김성수도 부통령직을 내던지며 항의했지만 이승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혼란 가운데 몇 달 전까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다가 총리로 임명된 장택상은 이승만이 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국회의 내각제 개헌안을 절충한 ‘발췌 개헌안’을 낸다.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미국이 개입하는 파국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주장도 나와. 장택상 역시 미국의 압박을 암시하는 얘기를 한 바 있지. 신익희, 조봉암이 포함된 국회 의장단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어. 조봉암은 이런 한탄을 했다지. “미국의 신탁통치보다는 이승만 박사 치하가 낫지 않겠소.”

어쨌든 개헌이란 헌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국회의원 대다수의 동의를 받아야 가능하지 않겠니. 그런데 앞서 발동했던 계엄령 탓에 국회의원들을 모으기가 어려워진 거야. 국회의원 수십명이 경찰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고 일부는 국제공산당으로 몰려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까. 1952년 7월2일 이승만은 실로 어이없는 담화를 발표해. “국회의원들 중에는 공격을 받거나 체포를 당할까 두려워 회석(會席)에 나오기를 꺼리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은 (대한)민국을 경찰국가라고 날인 찍는 분자들이 창조하고 전파시키는 것이다(〈프레시안〉 2015년 5월16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공권력이 총출동해서 도망 다니는 국회의원을 국회로 ‘모셨고’, 국제공산당 의원들도 석방돼 국회로 실려 왔다. 이 국회의원들의 임무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지. 그 행동대장으로 남송학이라는 국회의원이 나선다.

“의사당 앞에는 수많은 경찰들이 배치돼 외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의사당은 방청객이 출입하던 문을 폐쇄하고 의원 출입용 정문만을 개방하여 일단 의사당에 한번 들어간 의원은 남송학 의원의 출입허가증이 없이는 자유 출입이 엄금되고 있었다(〈동아일보〉 1952년 7월4일).” 남송학 의원은 서북청년단 등 악명 높은 우익 청년단체들을 하나로 묶어 만든 대한청년단의 간부 출신이었어. 이승만 독재가 더욱 강고해졌던 1956년, 야당이 단행한 거리 시위를 두고 ‘정치 쇼’라고 비아냥거리고 “자식 된 도리”를 운운하다가 거센 반발을 사게 되는 이승만의 충복이었지.

경찰과 깡패가 포위한 국회. 경찰에게 끌려 국회에 입장하고 그 안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했던 국회의원들. 너무 슬퍼서 도리어 웃음이 나는 풍경 속에 발췌 개헌안이 상정된다. 그리고 코미디가 또 한번 벌어지지. 김익노라는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부르짖은 거야. “만천하에 우리의 의사를 알리기 위해 기립 투표를 합시다(〈동아일보〉 1952년 7월6일).” 국회의원들이 집단 수용된 난민꼴로 국회 안에 갇히고 발췌 개헌안을 낸 장택상 국무총리가 화장실 가다가 뺨을 맞는 분위기에서 “반대자는 일어서시오” 식의 투표가 이뤄진 거지. 166인 출석에 163인 찬성. 그나마 3표는 기권이었다. 후일 선거법을 대놓고 어기다가 자신과 가족, 운동원들이 줄줄이 잡혀가고 의원직을 박탈당한 김익노는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승만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제가 기립 투표를 주장했습니다”라고 손 비비고 싶어 좀이 쑤시지 않았을까.

부산 정치 파동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 대통령이었어. 남송학·김익노 같은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의 필요에 따라 수족으로, 몽둥이로, 족쇄로 변신하며 큰 역할을 했지. 파국을 두려워한 국회는 무기력했고, 독재자에게 굴복했다. 이후 독재자는 더욱 거침없이 마이웨이를 걷게 됐지. 유능하고 용감한 국회가 왜 필요한지, 결기 있고 지혜로운 국회의원들이 왜 절실한지를 부산 정치 파동의 역사는 투명하고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니. 곧 투표권을 얻게 되는 네가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이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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