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쿠데타’에 술렁이는 방콕 거리
  • 이유경 (프리랜서 기자)
  • 호수 642
  • 승인 2020.01.0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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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반정부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선관위가 헌재에 개혁 정당인 미래전진당의 해산을 청구하면서 촉발됐다. 헌재는 사실상 정부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개혁 정치의 싹을 잘라왔다.
ⓒEPA지난 12월14일 방콕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 참석한 타나톤 미래전진당 대표(가운데)가 연설하고 있다.

지난 12월14일, 타이 방콕 시내에 위치한 방콕예술문화센터 인근에 1만여 명(인권단체 추산)에 이르는 시민이 모여들었다. 2014년 5월22일 군사 쿠데타 이후 타이에는 사실상 집회의 자유가 사라졌다. 기껏해야 ‘플래시몹(Flash mob)’ 형태로 삼삼오오 모였다가 금세 사라지는 시위 정도였다. 이날도 플래시몹 시위를 예상했다. 하지만 모여든 인파에 모두 놀랐다. ‘불의가 법의 허울을 입고 우리 앞에 서면, 저항은 의무가 된다.’ 반정부 시위대가 치켜든 피켓의 한 구절이다. 이들은 민주주의 회복과 헌법 개정, 독재 타도를 촉구했고, 일부는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을 주장했다.

시위를 제안한 이는 제3당인 미래전진당(퓨처포워드당)의 대표 타나톤 쭝룽르앙낏이다. 타나톤 대표를 비롯한 미래전진당 지도부는 격정적인 연설로 시위 분위기를 북돋았다. 2014년 5월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친탁신계 정당인 타이공헌당(프아타이당:타이인을 위한 당, 현재 제1야당)이 서민 중심의 대중운동 진영인 ‘레드셔츠’와 함께 거리에 나서기 일쑤였다. 시위 현장에는 레드셔츠 운동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미래전진당의 주요 지지층인 청년들도 가세했다.

신생 개혁 정당인 미래전진당은 2019년 3월24일 총선에서 80석을 얻으며 제3당으로 떠올랐다. 타나톤 대표는 가족 소유의 자동차 부품 제조기업 경영인 출신이다. 삐야붓 쌩까녹꾼 사무총장은 프랑스 유학파로 헌법학자 출신이자 타이의 진보적 법학자 그룹인 니티랏(Nitirat)에서 활동한 바 있다. 대개 고학력에 중산층인 당 지도부는 군과 왕실 등 기득권층이 좌지우지하는 정치판에 진보 의제를 과감히 들고나왔다. 그러자 친군부 정권이 견제에 나섰다.

지난 12월11일 타이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헌법재판소(헌재)에 미래전진당 해산을 청구했다. 선관위는 타나톤 대표가 당에 빌려준 1억9120만 바트(약 75억원)를 문제 삼았다. 선관위는 이것이 선거법 위반이며 정당 해산 요건이라고 보았다. 타이 기득권층은 사법부 판단에 기대어 개혁정치 세력의 싹을 잘라왔다. 이른바 ‘사법 쿠데타’라 할 수 있다. 2006년 9월19일 탁신 총리가 군사 쿠데타로 쫓겨난 이래 사법 쿠데타가 빈번했다.

2007년 5월30일, 군정이 임명한 판사들로 구성된 헌재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탁신계 정당이었던 타이락타이당(애국당)을 해산시켰다. 당의 주요 인사 111명은 5년간 정치활동도 금지당했다. 이때 정치활동금지 처분을 피했던 이들은 ‘국민의힘(PPP)’을 창당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해 정부 구성에 성공했다. 탁신은 왕정주의 이력이 선명한 우익 정치인 사막 순타라웻(2009년 사망)을 영입해 총리를 맡겼다. 왕정주의 정치인의 영입도 탁신 세력의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헌재는 사막 총리가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받은 출연료가 헌법에서 규정한 공직자 겸직 금지를 위반했다며 사퇴 결정을 내렸다. 사막 총리는 2008년 9월 취임 9개월 만에 하차했다. 그 뒤를 이은 솜차이 웡사왓 총리도 2008년 12월2일 헌재 결정으로 3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헌재는 당시 국민의힘이 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다며 해산 명령과 더불어 5년간 주요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솜차이 총리 체제에 반대하는 ‘옐로셔츠’가 공항을 점거하는 등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헌재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2009~2010년 총선을 요구하는 ‘레드셔츠’ 시위와 군의 유혈 진압이 이어졌다. 2011년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타이 역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올랐다. 반정부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잉락 친나왓 총리는 2014년 2월 조기 총선 카드를 꺼내 승부수를 던졌다. 야당은 총리 사퇴가 먼저라며 선거를 보이콧했다. 사실상 여당의 단독 선거로 치러졌다. 헌재는 이때도 조기 총선 자체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정국은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3개월 뒤인 5월22일 다시 군부가 직접 나섰다.

ⓒEPA2019년 8월 타이 왕립경찰본부를 방문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헌재 판결로 의원직 박탈당한 타나톤 대표

이렇게 헌재는 지난 10여 년간 사실상 정부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법에 기댄 사법 쿠데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개혁 정당인 미래전진당의 운명도 그들 손에 달렸다. 타나톤 대표는 지난 12월2일 ‘타이 외신기자클럽’ 토론에서 “당이 직면한 소송 건수가 총 28건이다. 우리 당을 해산시키려는 시도를 직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소송 주체도 경찰, 검찰, 헌재, 선관위, 집권 연정, 우익 인사 등 다양하다. 이미 타나톤 대표는 11월2일 헌재 판결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헌재는 타나톤 대표가 2019년 3월 총선 출마 당시 미디어회사 지분을 소유한 것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타나톤 대표는 총선 출마 전인 1월 이 지분을 처분했다고 해명했지만 헌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래전진당이 당한 소송에는 선거법 외에도 다양한 혐의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경우는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한 것도 문제 삼았다. 2018년 6월29일 타나톤 대표와 지도부 두 명이 “금요일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라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으로 쁘라윳 짠오차 총리를 비판했다. 이들은 컴퓨터범죄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했다. 만일 유죄판결을 받으면 타나톤 대표는 최소 5년형에 처해지고 당도 해산당한다.

2019년 7월 나따뽄 또쁘라윤이라는 우익 변호사가 미래전진당을 선동죄로 고발했다. 그는 ‘미래전진당이 왕실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황당했다. 그는 “미래전진당 로고가 일루미나티 마크와 유사하다. 두 조직의 은밀한 커넥션이 있다”라며 고발했다. 1700년대 독일에서 만들어진 비밀 결사체인 일루미나티는 해산됐는데, 전 세계 음모론자들은 지금도 그림자 정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현재 타이 정부를 이끄는 이는 2014년 군사 쿠데타의 주역 쁘라윳 짠오차 총리다. 그는 2019년 6월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미래전진당 타나톤 대표를 물리치고 총리직에 올랐다. 경쟁자에 대한 쁘라윳 총리의 속내가 측근의 입에서 나왔다. 육군 총사령관인 아삐랏 꽁솜뽕은 2019년 10월11일 육군본부 국가안보 강의에서 “공산주의자 정치인들” “해외 유학파” “극좌(성향) 학자”들이 왕실 전복 음모를 꾸민다며 비난한 바 있다. 비록 이름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미래전진당 인사들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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