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외치다 목숨 잃은 언론인
  • 정희상 기자
  • 호수 642
  • 승인 2020.01.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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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에 창간한 〈민족일보〉는 박정희 군부에 의해 3개월여 만에 폐간되었다. 5·16 쿠데타 세력은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2008년 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시사IN 윤무영형 조용수씨가 사형당한 뒤 일가족이 겪은 세월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조용준씨.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조용준씨(85)는 1961년 12월22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형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아침에 형에게 면회 갔더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라. 이틀에 한 번꼴로 면회를 다녔는데 그 말이 형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 몰랐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용준씨는 12월21일 오후 4시 라디오로 형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 당시 조용수의 나이 31세. 〈민족일보〉 창간을 문제 삼아 사형까지 시킨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튿날 시신을 수습한 용준씨는 아버지와 상의해 조용수 사장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조용수 사장과 용준씨는 네 살 터울. 동생 용준씨에게 형은 까다롭고 엄격한 스승에 가까웠다. 〈민족일보〉가 창간되고 형이 사장을 맡자, 용준씨는 기획실장으로 들어갔다. 창간 전후 용준씨는 주로 형의 자금 마련 심부름을 했다. “아버지는 살고 있던 부산 집을 팔아 창간자금을 댔다. 진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형의 고향 친구도 제법 큰돈을 보탰다.”

하지만 창간 3개월 만에 터진 5·16 쿠데타 세력이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일본에서 조달한 창간자금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조용수 사장이 조총련계 자금 1만환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고 밝혔다. “형의 장인어른이 일본에서 파친코를 하던 민단 간부였다. 거기서 들어온 돈을 박정희와 김종필 등 쿠데타 세력은 조총련 자금이라고 날조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공소장에 쓴, 형에게 돈을 댄 북한 간첩이라고 지목한 이영근은 나중에 정부(노태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에 어딨는가.”

조용수는 1930년 경남 진양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2·3·4대 자유당 의원을 지낸 조경규씨가 삼촌이고, 미군정 시기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낸 하만복씨가 외삼촌이다. 형은 진주에 있던 외삼촌 집에서 자라면서 광복 후 진주중학에 진학해 주로 우익 학생모임 ‘민연’에 가담해 활동했다.” 대구 대륜고를 거쳐 연세대학에 진학한 조용수는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정경학부에 편입했다. 조용수는 재일 한국인 모임인 거류민단 기관지 〈민주신문〉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언론과 첫 인연을 맺는다.

일본에서 그의 활동은 대부분 보수적이었다. 재일동포 북송 사업이 한창이던 1956년 조용수는 앞장서서 ‘북송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대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조용수의 활동에 변곡점이 생긴다. 진보당 사건이 터지자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씨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영근은 일본에서 만난 조용수에게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설파했다. 두 사람은 이승만의 부당한 정적 제거에 맞서 싸우기로 의기투합했다. 조용수는 조봉암 구명 운동에 앞장선다.

1959년 7월31일 조봉암이 사형당한다. 이듬해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진다. 조용수는 귀국길에 올랐다. 동생 용준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형이 귀국해 현역 의원이던 조경규 삼촌을 찾아가 ‘총선에 출마하고 싶으니 경남 함안 지역구를 물려달라’고 부탁했다. 삼촌은 ‘이번은 내가 출마하고 다음 선거 때 물려주마’라고 거절했다. 결국 형은 연고가 없는 경북 청송에서 혁신계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했다.” 1960년 총선에서 혁신계는 전국적으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조용수도 3위로 낙선했다. 선거 패배 후 혁신계 정당의 대통합과 진보 신문 창간 필요성을 절감했다. 조용수는 민단에서 신문을 제작한 경험을 살려 자신이 진보 신문 창간에 전념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0년 동안 일본 민단에서 〈민주신문〉 편집 활동을 매개로 재일 한인들과 폭넓은 교분을 맺었던 터라 조용수의 모금운동에 호응해줬다. 이때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도 적극 도왔다. 국내에서는 동생 조용준을 시켜 친척과 지인들을 상대로 적잖은 창간자금을 모았다.

ⓒ연합뉴스 김태식 제공1961년 8월28일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법정에 들어서는 〈민족일보〉 간부 조용수·송지영·안신규(왼쪽부터).

중립화 평화통일론 역설한 〈민족일보〉

모금에 성공한 조용수는 1961년 2월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사시로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등을 내걸었다. 특히 〈민족일보〉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역설했다. 통일이야말로 역사적·절대적 과제라 전제하고, 통일을 이룰 방법은 남과 북이 평화 공존할 수 있는 중립화의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민족일보〉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펴면서도 반소련·반김일성 노선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이승만 같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자로 하여금 단독정부를 세우게 했다면, 소련 역시 김일성 같은 괴뢰적 인물을 내세워 영토와 인민의 분열을 조장했으며 통일을 방해해왔고, 더구나 전쟁까지 도발했다’는 논조였다.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비판적이었다면 소련과 김일성 정권에는 적대적이었다.

이런 과감한 보도와 논설로 〈민족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한 달도 안 돼 4만 부 넘게 발행했다. 이 신문은 짧은 기간 안에 분열된 진보 세력을 통합하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민족일보〉 창간 3개월여 만에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민족일보〉 간부들은 처음에 5·16 쿠데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조용수 사장은 쿠데타 이튿날 군부에 희망과 기대를 담은 사설까지 실었다.

박정희 군부는 쿠데타 이후 바로 혁신계 체포에 돌입했다. 5월18일 〈민족일보〉 간부 10여 명을 전격 체포했다. 당시 기획실장이던 용준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날 독감이 걸려 오후 2시경에 신문사로 들어가는데 정문에서 〈민족일보〉 만평을 그리던 백인수 화백이 다가오지 말라고 화급히 손짓했다. 형과 간부들이 다 잡혀가고 나는 지명수배 됐다고 해 일단 부산으로 도피했다.”

〈민족일보〉는 5월19일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됐다. 쿠데타 세력은 신문사 간부들을 구속했을뿐더러 재산에 대해서도 전부 몰수 조치했다. “나중에 회사에 나가 확인해보니 신문사 임대보증금 및 직원 월급 등 운영비는 물론 취재용 지프차 2대, 오토바이, 카메라와 사진부 인화·현상 시설, 하다못해 재떨이까지 모든 집기를 쿠데타 군이 다 싣고 가버렸더라.” 용준씨는 오래된 문서 한 장을 보여주었다. 1962년 12월11일자로 육군본부 법무감실에서 중앙정보부에 보낸 〈민족일보〉의 ‘몰수금품 처리’라는 문서였다. “중앙정보부는 그때 압수해간 민족일보사 재산 일체를 돌려주지 않고 착복했다.”

박정희 쿠데타 군은 혁신계 등을 처벌하기 위해 법안을 급조했다. 1961년 6월22일 박정희 쿠데타 군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입법했다.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제6조).’ 이 법안은 3년6개월까지 소급 적용됐는데, 진보적인 인사들은 주로 이 6조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조용수도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한 뒤 무정견한 통일론을 실어 북괴를 이롭게 했다’며 6조 위반 혐의를 받았다. 쿠데타 군의 재판소는 중립화 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며 조용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조용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국제기구에서 항의가 쇄도했다. 국제신문인협회(IPI)는 한국 정부에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국제펜본부도 항의 성명을 냈고, 일본 민단에서는 조용수 구명운동위원회가 꾸려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사설로 “반국가 행위 혐의로 언론인을 사형시키고 무기징역에 처하는 것은 박정희 의장이 지향하고자 하는 한·미 관계에도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일본에서 조용수와 대척점에 서 있던 조총련도 성명을 냈다. “조용수는 총련과는 노선과 입장을 달리하는 민단 간부였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적 입장에서 조씨에 대한 사형 판결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1961년 8월2일 조총련 중앙상임위 성명).” 국제사회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용수는 1961년 12월21일 사형을 당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조용수에게 ‘국제기자상’을 수여했다.

박정희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어

당시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대학생과 진보 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제압하는 것이 시급했다. 박정희 자신과 친인척의 과거 남로당 관련 경력으로 인한 미국의 의구심도 해소해야 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게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이런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조용수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송지영은 1969년 출소했다. 출소 후 송지영은 문예진흥원장과 KBS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중앙정보부가 ‘북한 간첩’으로 지목해 조용수를 처벌할 매개자로 활용했던 이영근은 이후 자유로이 서울을 방문하고, 자신이 일본에서 운영하던 〈통일조선신문〉 서울지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0년 사망하자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조용수가 사형당한 뒤 일가족이 겪은 신산한 세월을 동생 용준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일보〉 창간에 재산을 쏟아부은 우리 가족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풍비박산 났다. 어딜 가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에 숨쉬기조차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용준씨가 연좌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에 나선 때는 2006년이었다. 그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을 진정했다. 진화위는 박정희 쿠데타 군부의 간첩 조작 및 사법 살인으로 규정했다. 진화위는 결정문에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은 당시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이 철저한 반공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쿠데타 장애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불법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밝혔다.

용준씨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008년 법원은 재심에서 조용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언론인 조용수는 명예를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용수 사형 58주기를 지낸 용준씨에게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은 아직 끝난 과거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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