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 시스템 생존자’, 권리를 말하다
  • 순록 (활동명·정신의학 시스템 생존자)
  • 호수 642
  • 승인 2020.01.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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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시스템 생존자’ 순록씨는 한국 정신보건 시스템에는 정신과 약물 투여 또는 병원 입원을 통한 분리 외에 대안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당사자에게 치료 방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사IN 이명익2019년 10월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한국 최초로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축제 ‘매드 프라이드’가 열렸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사자에게 몇 살 때, 어디서, 어떻게 정신질환적 징후가 발생했는지 명확하게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나에게 그런 진단을 만족시키는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생각이 특이하고 유별난 아이였던 나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하는 나의 모습이 불구자 같아서 수치스러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빠가 있는 집도, 학생을 압박해서 성적을 올리려는 학교도 견디기 버거웠다. 나는 단지 집이나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쉬고 싶었다. 엄마에게 상담자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엄마는 정신과 의사와 면담 약속을 잡았고, 나는 순진하게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갔다. 내가 정신보건 시스템에 발을 들인 첫 경험이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정신과 환자로서 경력이 생겼다.

당시 나는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 식사를 거부하자 정신과 의사는 내게 ‘밥을 계속 안 먹으면 자살 시도로 간주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억지로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엄마는 나를 입원시켜버렸다. 심지어 엄마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엄마는 미리 응급차를 호출해놓은 상태였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하던 사람이 배신했다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울먹이며 호소하는 말은 그때부터 모두 ‘증상’으로 기록됐다. 나는 내게 입원이 왜 불필요한지 설명하려고 몇 시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탈진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만난 레지던트 의사는 내게 “아빠가 문제가 더 많지만 아빠를 가둘 수 없으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라며 아빠와 5분 이상 대화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나(개인)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데, 병원에서는 나만 데려다놓고 어떻게든 고치려고 애쓰는 셈이었다.

나무 막대기를 든 아저씨들로부터 에워싸이고 응급차로 이송되고, 병원에 입원되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경험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삶에서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또다시 강제로 입원되는 악몽을 꾸며 울다 잠에서 깨곤 했다. 강제 입원 경험과 정신건강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면화된 정신의학적 목소리는 수시로 내 마음을 전쟁터로 만들어놓았다. ‘내가 비정상인가?’ ‘내가 진짜 아픈 걸까?’

왜 정신적인 고통 가운데 놓인 사람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걸까?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 삶에서 내게 필요한 도움이 어떤 형태일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을 통해 정신보건 시스템에 발을 들인다.

그러나 현재 정신보건 시스템에서는 정신과 약물을 통한 증상 완화 혹은 병원 입원을 통한 분리 및 보호관찰 이외에 다른 대안적인 도움이 제공되지 않는다. 처방약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최선의 치료라는 말을 들으며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병이 가져다주는 정서적인 고통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환자’가 되어 사라져버린 권리

사람들은 흔히 진단이 내려지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처방과 치료책이 찾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 정신의학은 정신적 고통이 신체적 질병처럼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뇌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나아지지 않는 것 같으면 가차 없이 약물치료나 강제 입원 등 처벌과 같은 경험을 강요한다. ‘환자’가 됨과 동시에 노동을 하고 수입 창출을 할 권리,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권리 등 삶에서 중요한 권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단지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돼버린다. 본질적인 부분은 해결되지 않으니 병원에서 퇴원한 뒤 일상적인 환경으로 돌아가면 나아진 것은 없다. 오히려 낙인 효과까지 가중돼 삶이 더 어려워진다.

‘정신의학 생존자’들은 위기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강요 없이 자신이 어떤 도움을 받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양에서 오래전에 진행됐던 탈원화는 한국에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다. 병원에 갇히고 순응하는 삶에 익숙해져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꿈을 꾸기 어려운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위기의 순간에 받을 수 있는 도움이 고작 병원 입원뿐이라면, 시설 밖에서의 삶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무의미할까? 의료적인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당사자가 충분한 정보와 선택권을 보장받은 뒤에 의료적인 도움을 선택할 것인지, 대안적인 도움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모든 일을 겪은 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를 회복시킨 건 약물이나 입원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단단한 신뢰 관계 속에서 이어지는 일상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생존했다(‘동료 옹호’라는 치유 방법 중 하나다). 나는 대학에 갔고 내 아픈 기억에 의미를 찾게 해준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정신의학의 독점적 지위에 대해 비판적인 임상 심리학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내 생각을 정리해나갔고 나의 목소리를 확고히 냈다.

한국에서는 이제 막 시작된 일이다. 한국은 정신의학의 한계에 대한 논의나 정직한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너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한국에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지속하기에는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자조모임 등 정신보건 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격려해주던 한 임상 심리학자가 내게 보낸 글을 반복해서 읽어보며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당신은 가족과의 암울한 시간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론 당신도 종종 의심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이 겪는 고통은 당신 자신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치료 문화의 폐해 중 하나는 고통을 무효로 만들고, 하찮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경험을 가장 잘 사용하고 있고, 그건 아주 힘든 일이며 존경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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