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운이 좋아 죽음을 예비할 시간이 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여기 코마(혼수상태) 환자가 있다. 헨리는 헤어진 아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나기 위해 희망찬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선택한 행동이 불운한 사고로 이어져 코마에 빠진다. 그러곤 갖가지 뒤엉킨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대개는 깊은 슬픔과 후회로 얼룩진 생각들이다. 그런데 그 슬픔과 후회는 성취하지 못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그 슬픔은, 그 후회는, 끊겨버린 관계에 대한 것들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을까. 죄책감과 결벽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찢겨진 관계들이 의식 속에 떠오른다.

아버지를 불러냈던 어린 아들이 병원을 찾아온다. 샘은 사람의 감정이 색채로 보이는 능력을 지닌 특별하고 영민한 소년이다. 샘의 어머니는 헨리와 일찌감치 헤어져 새로 가정을 꾸렸다. 엄마는 말했다. 너의 친아버지는 너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코마로 누워 있는 헨리의 팔목엔 예전에 샘이 부친 편지에 있던 싸구려 팔찌가 묶여 있다. 샘은 마음이 무너진다. 아버지는 나를 보러 오다가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나를 생각하고 보고 싶어 했다! 샘은 어떻게든 헨리의 의식에 가닿기 위해 노력한다.

헨리의 헤어진 연인 에디도 그를 찾아온다. 헨리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사람. 둘은 헤어졌지만, 헨리는 자신의 죽음을 선포할 권리를 에디에게 남겼다. 에디는 당황스럽고 또 원망스럽지만, 결국 이 무시무시한 권리를 받아들이고 헨리를 보살핀다. 그리고 샘을 만나게 된다.

갑작스레 삶의 연속성이 끊기고 병원에서 만나게 된 세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헨리가 깨어나길 바라며 간호하고 말을 거는 일. 헨리와 맺었던 관계의 진실을 음미해보는 일. 가장 강렬하게 겪었던 주변의 죽음을 다시금 복기하는 일. 그래서 죽음과 헨리와 자신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 그러면서 우리는 세 사람의 삶 전체와 각자가 서로에게 가진 의미를 같이 음미하게 된다.

병원은 환자나 간병인에게 병원 밖 삶의 맥락과는 분리된 세계다.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한다. 삶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더 많은 사랑을 남기지 못했을까. 그러다가 미궁에 빠진다. 진실하게 사랑을 남기는 일은 왜 항상 그렇게 복잡한 수수께끼처럼 어려웠을까. 다만 〈꿈의 책〉을 읽다 보면 긍정하게 되는 것이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은, 나의 의식은 삶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애쓰겠구나. 사람의 서사란 결국 남겨놓은 사랑과 관계에 대한 것들이겠구나.

기자명 유종선 (드라마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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