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늘 가난했지만 그래도 스무 살에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았다. 이제야 행복해지나 보다 싶은데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후 재능 있고 사이좋던 남편은 암에 걸리고 2년 동안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다 어린 아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다. 결혼식에 부를 친척이 단 한 명도 없어서 지인들이 대신 사진을 채워줬을 정도로 외로운 삶을 살았던 주인공은 스무 살부터 30대 중반이 되도록 남편과 단둘의 우주에서만 지내왔기에 그의 죽음은 가족 전체가, 모든 친구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걸 뜻했다. 그리고 이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와 단둘이 남은 그녀는 엄마도 죽을 거냐고 묻는 아이에게 ‘세상’이 되어줘야 하기에 오늘도 일어나 밥을 하고 품을 팔러 나간다.

소설이었으면 읽지 않았을 거다. 과하게 신파일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 실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엄청난 얘기들을 남 얘기 하듯 그 어떤 수사도 없이 짧은 문장으로 툭툭 던져놓는다. 마치 “인생이 뭐 이런 거 아니겠어?”라는 듯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쓰면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그렇게 쓰지 않았고, 울면 너무 힘들 것 같아 울지 않았다는 구절이 짧지만 강한 힘을 가진 문장의 동력을 설명한다.

연극학도 시절 스승의 가르침은 이랬다. 슬픈 장면을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슬픔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이 왜 슬픈지 관객에게 ‘전달’하는 거라고. 전달하는 것을 잊은 채 배우가 지레 울어버리면 ‘똥배우’라고. 지은이가 비교적 가까운 본인의 과거를 담담히 써내려가는 걸 읽으면서 스승의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책은 울지 않는데 내가 정신없이 울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슬플 때 일부러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자신을 ‘그저 군중 속 한 사람’인 상태로 둔 다음 생각해본다. 저 사람들이 내 슬픔을 모르듯, 나 또한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치는 사람 하나하나가 지닌 삶의 무게들을 모른다고. 그러니 내 일도 그저 인생사 중 한 토막일 뿐이라고.

이 책의 힘은 여기에 있다. 감기만 걸려도 자기 연민에 빠져 SNS에 주삿바늘 꽂힌 팔을 찍어 올리며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구걸하는 요즘 세상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아낸 저자는 자신의 비극을 담담히 기록하여 기어이 소격효과(거리 두기)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힘. 그 덕분에 값싼 동정심이나 비교하고 안도하는 마음을 갖는 대신, 다음은 내 차례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건 탄생도 죽음도 모두 랜덤인 인생 처지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걸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은이를 꼭 한번 안아주고 싶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기자명 오지혜 (배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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