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1963년 가을, 만 스물세 살의 아니 에르노는 임신을 한다. 바라거나 기대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임신이었다. 임신을 알게 된 순간 에르노는 “(본인의)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랑과 쾌락”은 비록 같이 누렸지만 임신을 한 것은 여성인 에르노뿐이다. 그로 인해 신체가 변하는 것도, 아이가 몸속에 생겼다는 사실로 인하여 심리적 압박을 받는 것도 에르노다. 만일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면 출산을 겪어야 하는 것도, 양육을 주로 해야 하는 것도 에르노 혼자만의 일이다. 인생이 몽땅 달라지는 것이다.

영리하고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부모가 속한 하층계급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에르노이지만 ‘원치 않는’ 아이의 임신을 지속한다면 다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당시 프랑스에서 미혼 여성이 아이 엄마가 되는 것은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떨까. 결혼하지 않고, 아이 아버지가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임신하는 경우, 그 여성이 겪게 되는 현실은 어떤가 하는 질문이다. 이보다 여건이 훨씬 낫다고는 하지만 사실 현재의 프랑스도 이런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에르노는 ‘당연히’ 낙태를 선택한다.

임신 및 낙태와 관련한 에르노의 고민에 태아에 대한 죄책감이나 모성애 같은 감정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신체와 목숨이 걸려 있는 마당에 이런 ‘고상한’ 감정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할까. 이런 감정을 들어 타인의 낙태를 반대하고 불법시하려는 이들의 경우, 자신의 무언가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이 자전적 기록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에르노가 낙태라는 결과를 얻어내기까지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담담하되 섬세하다. 다만 이 얇은 책은 어쩐지 〈82년생 김지영〉과 유사한 기분을 독자들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르노의 처지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들은 이 책을 생생하고 고통스럽다고 느낄 것이고, 어쩌면 굳이 읽을 필요도 없다고 느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읽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리라는 얘기다.

프랑스에선 당시 낙태가 불법이었으므로 에르노는 적법한 조력을 받지 못하고 목숨을 걸고 낙태를 하게 되는데, 한국에서도 낙태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다만 지난 4월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으므로 2020년 말까지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한다. 과연 사회가 어떻게 여성의 임신에 관여할 것인지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자명 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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