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는 여러 문화계 종사자들의 작업실이 있다. 그중 꽤 오래 전부터 내 시선을 잡아끈 곳이 있는데 보통의 작업실과 달리 이곳에는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에는 ‘상식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나는 〈밀크맨〉을 읽는 도중에 그 문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소설이 특수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수시로 읽는 이로 하여금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상식’에 대해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밀크맨〉은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자치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반대 세력 간에 벌어진 이야기를 10대 후반 여성의 시각에서 쓴 작품이다. 소설에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독약을 먹이는 ‘알약 소녀’, 어린아이들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댄서의 삶을 사는 부부 등 실생활에서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특별한 것은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라는 특수한 상황을 읽는 내내 한국 현대사를 떠올리게 해서 마치 우리의 일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특정 사건이라기보다는 오랜 폭력과 억압이 일상화된 곳에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밀크맨’은 나를 파괴하는 억압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뜻밖에 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 인물은 주인공 ‘나’의 아버지다. 항상 얼이 빠진 상태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던 그가 죽기 전 가족들에게 유언처럼 내뱉은 말은 ‘어릴 때 여러 차례 강간을 당했다’였다. “평생 계속 돌아오고 계속 이어지고 계속 끔찍했어. 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어, 여보. 이미 여러 해 전에 포기하고 나 자신을 버렸어.” 어릴 적 연이어 남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무너져 내렸던 심정에 대해 말했다. 자식들의 안부 걱정이나 유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릴 적에 집중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가족들을 실망시켰지만, 나는 이 인물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성적 학대에서 비롯된 비극이 당사자와 주변뿐 아니라 미래에 그가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이 소설은 여성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작가는 주인공 ‘나’의 입을 빌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라고 썼다. 나는 이 말은 ‘슬프지만 사실’이라고 여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곳곳에 유머가 번져 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마치 한국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자연스러운 번역도 좋았다.

기자명 이기용 (뮤지션·록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