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2008년 8월, 18세 여성 마리는 낯선 침입자에게 강간당했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마리의 성장 배경(부모에게 버림받고 어린 시절부터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았다)과 성격(감정적이고 타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한다), 강간 신고 뒤의 행동(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굴었다)이 ‘진실한’ 피해자 같지 않았다. 경찰은 마리의 진술에서 사소한 모순을 발견하여 집요하게 캐물었다. 결국 그는 강간 신고가 허위였다고 진술을 철회했고, 그 때문에 경찰로부터 기소당한다. 하지만 3년 뒤, 타 지역에서 마리 사건의 진범이 검거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사로잡았던, 여성을 가학적으로 굴복시키는 판타지를 현실화하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워 수차례 여성들을 강간한 악질적인 성범죄자였다.

저자들은 이 성폭력 사건과 잘못된 수사 관행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법의 역사와 맞서는” 사건이었음을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모든 법정에서 디폴트값은 언제나 의심이었다.” 미국의 사법부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1671년 영국 대법원장 매슈 헤일부터 시작하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 토머스 제퍼슨, 미국 연방대법관 헨리 브록홀스트 리빙스턴, “증거법 분야의 20세기 대표적 전문가”였던 존 헨리 위그모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성인들’은 강간 피해를 증언하는 여성을 의심해야 하는 ‘마땅한’ 근거들을 대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여자의 상상이거나 거짓말이며 여자가 원했고 동의했을 거라는 그들의 믿음, “진정한 피해자는 무고한 남성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놀랍게도 2019년 현재의 한국에서 너무나 쉽게, 거의 매일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저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저 억울한 남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수많은 악의적인 목소리들.

이 원고를 쓰던 중, 사귀던 남성에게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당했고, 그 사실이 밝혀진 뒤 무수한 매체들과 ‘잘 걸렸다’ 식으로 덤벼들어 악플을 달아대는 ‘누군가들’과 마지막으로 사법부에게까지 조롱당했던, 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면서 평가절하했던 이들에게 용감하게 맞섰던 가수 겸 배우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언제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뒤늦은 추모를 해야 한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참담하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의 말미에는, 강간범이 체포되어 적절한 선고(327년 6개월의 징역형)를 받은 뒤 마리를 비롯한 피해자 혹은 생존자들이 어떻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는지, 어떻게 공포와 악몽을 극복하려 애쓰며 삶을 되찾고 있는지를 증언한다. 한국에서 이 같은 ‘후기’를 읽는 것은 요원한 소망인가. 피해자가 죽어야만 그 ‘진정성’을 인정해주는 이 더러운 관행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기자명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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