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나를 진정 괴롭게 만들 수 있는 건 싫고도 좋은 무언가다. 좋기만 하거나 싫기만 한 상대 때문에 느끼는 괴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너무 좋은 점과 너무 싫은 점을 동시에 가진 애증의 상대만이 복잡한 괴로움을 준다.

〈아무튼, 예능〉의 작가 복길에게는 텔레비전이 그런 상대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복길은 어릴 적 장래 희망이 PD였다. PD는 방송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기 전의 일이다. 훗날 그는 PD가 아닌 다른 일로 방송국에 취직했고 예전보다 텔레비전을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열렬하게 그것을 본다.

복길은 이 시대의 온갖 예능 방송에 대해 쓴다. 미친 듯이 웃기는 예능, 그다지 웃기지는 않은데 매우 흥미로운 예능,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나오는 예능, 경악스러운 예능, 한숨 나오는 예능, 잔인한 예능, 시대착오적인 예능, 퇴보하는 예능, 웬만해선 달라지지 않는 예능, 그 와중에 달라지고 있는 예능, 새로운 예능, 후련한 예능. 가슴 벅차게 하는 예능, 전복적인 예능…. 정말이지 그는 놀랍도록 많은 예능을 봐왔다. 웃거나 웃지 않으면서 봤을 것이다.

예능을 보며 느껴온 복잡한 괴로움에 관해 복길은 쓴다. 나에게 그건 매우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 싫은 것에 대해 열심히 말하는 건 진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것에 대해 말할 때 주로 힘이 솟아난다. 싫은 게 왜 싫은지 정확히 말하려면 싫은 것을 보고 또 보며 자꾸 생각하고 분석해야 하지 않나. 그러므로 내게 ‘예능’은 도망치고 싶은 글감이다. 계속 배꼽 냄새를 맡는 듯한 집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길은 도망치기는커녕 몹시 경쾌한 문장으로 그것을 서술한다. 그러고선 덧붙인다. “가장 열렬한 시청자로서, 싫은 것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복길의 글쓰기는 후진 것 말고 근사한 것에 대해 쓸 때도 빛이 난다. 너무나 별로인 설정과 자막 속에서도 보석 같은 유머를 갈고 닦아온 사람들이 여전히 텔레비전 안에 있다. 복길이 오랫동안 좋아하고 존경해온 방송인들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복길을 팬으로 살게 했다. 복길은 자신의 지성과 통찰을 바쳐 그들에 대해 쓴다. 그의 꼼꼼한 인물론을 읽다 보면 〈아무튼, 예능〉을 완성시킨 건 증오보다 사랑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겨울 나는 복길과 함께 귤을 까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 같은 부분에서 미간을 찡그리거나 물개박수를 치며 웃을 것 같다. 비슷한 타이밍에 심드렁해하다가 어느새 눈물과 콧물을 훔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만남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 내 서재에는 〈아무튼, 예능〉이 꽂혀 있고 트위터에서 복길의 실시간 TV 중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슬아 (작가·헤엄출판사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