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에밀리 디킨슨의 시 대부분은 사후에 ‘발견’되었다. 그 발견이 과거의 시인을 현재에 살

게 한다. 디킨슨은 생전에 크게 알려진 시인은 아니었지만, 일생을 통해 수많은 말과 글을 남겼다. 엄청난 양의 종이에 반듯하게 쓰인 수많은 글은 손바느질로 묶여 옷장 속에 잠들어 있다가 비로소 ‘시’라는 이름으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이 40여 벌의 종이 뭉치는 ‘파시클(fascicles:작은 다발, 분책)’이라 불렸다. 에밀리 디킨슨 시의 오랜 연구자이자, 지속적으로 그녀의 시를 편편이 고르고 번역해 직접 책으로까지 출판해온 ‘파시클출판사’의 박혜란 대표. 그의 의지가 지금 여기, 그치지 않을 듯 아우성치는 성별 투쟁 중의 한국 독자들에게 ‘여성 시’ 혹은 ‘페미니스트 시’로서 에밀리 디킨슨의 언어를 다시 발견하게 한다.

19세기 미국의 여느 여성들과 같은 삶을 살기를 거부함으로써 규범에 저항했고, 여성·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내려놓지 않았던

디킨슨은 언어와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만물을 향한 호기심과 연구 또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시의 문법과 언어의 질서에 서툰 것으로 폄훼되어왔던 디킨슨의 시는, 다시 보면, 어떤 시어의 규범과 계보로도 범주화되기 어려운 독자성을 지녔다. 아마도 디킨슨은 마치 ‘캥거루’ 같은 외톨이였고, 그녀의 시는 ‘계보 없는’ 마녀의 마법처럼

유별난 것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그 독자성이 벼려낸, 단지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갈등과 부대낌의 시어들이 지금 여기 또 다른 여성들의 삶 위에 층층이 포개져 다시 발견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페미니스트 시’라 불러야 할 것이다.

글을 쓰고 그것을 다듬어 묶어내는 그녀의 손과 그 시대를 한참이나 건너와 2019년 한국 독자들의 손에 넘겨진 이 시어들은 더 널리 더 오래 여행함으로써, 어떤 포기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계보’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그것이 바로 문학 혹은 창작의 가장 위대한 영향력이리라.

한편 그래픽 디자이너 컬렉티브 ‘들토끼들’에 의해 눈에 띄게 감각적인 디자인의 ‘파시클’로 단장한 디킨슨의 시집은 모처럼 책이라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게 한다.

기자명 정은영 (미술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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