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헌법 전문이 선언하듯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수다한 말과 글이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렸다. 그중에 이 책, 권보드래의 〈3월1일의 밤〉이 도드라진다.

먼저 3·1운동을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하게 해준다.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임과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일련의 혁명 연쇄(신해혁명, 이집트혁명, 러시아혁명, 헝가리혁명, 독일혁명, 5·4운동 등) 속에 놓인 세계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제국들이 붕괴하고 약소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책은 3·1운동이 어떻게 세계와 교류하고 호흡한 사건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늘 ‘민족사적 시야’를 우선시하곤 하는 우리 관습에서 무척 신선하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장점은 수많은 인물 군상이다. 유봉진, 이희승, 이영철, 박경순, 정금죽, 어윤희 등 보통 사람의 이름이 무수히 등장한다. 지은이가 방대한 3·1운동 신문조서를 꼼꼼히 읽으며 찾아낸 이들이다.

구한국 군인 출신인 강화도의 은세공업자 유봉진(34세)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대단하다는 말에 마음이 뛰놀았다. 지인과 계획을 세워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옷에 결사대라 새기고 결사대장 깃발을 휘둘렀으되 오직 자임한 역할이었다. 서울 기생

정금죽(21세)은 “깊은 뜻은 모르나 종로 네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젊은 가슴은 흥분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시위 행렬을 따라다녔다. 이후 정칠성으로 개명하고 일본 유학을 거쳐 여성동우회, 근우회,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다. 경북 영천읍의 아낙 김정희(24세)는 만세 소문을 듣고 흥분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날이 밝자 홀로 노상에서 독립기를 휘두르고 만세 부르다 체포되었다. 동생이 고등계 형사라 누이에게 불온한 동기를 부인하라 압박했다. 거절하자 정신병자로 몰았다.

범속한 삶들이 만세를 부르고 기꺼이 감옥으로 향했다. 독립에 대한 공감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무엇보다 자기 인생을 해방하고자 한 의지가 이들의 삶을 바꾸었다. 3·1운동은 이전까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던 미약한 존재들이 목소리를 낸 사건이기도 했다. 토지를 나눠준다는 소문에 감복한 빈농이, 막 등장하던 도시노동자 계급이, 순종을 강요당하던 여성이, 백정이 3·1운동에서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책은 16개 키워드로 3·1운동과 전후를 살핀다. 어디부터 읽어도 좋다. 어디든 여기 같다. 한국 근현대 문화사 연구를 개척해온 지은이의 역량이 현재성을 잘 살렸다. 세상의 변화와 자기의 변화 사이에 놓인 고민이 여전한 탓이기도 하리다. 백 년 지난 일이 지금 같은 소이다.

기자명 조형근 (사회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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